태을도 수원법소 대한(大寒)치성 도훈
"따뜻한 인정이라야 완성되는 세상"
2017년 1월 20일 (음력 12월 23일)
제가 대학교 때, 그것도 벌써 한 20년이 넘었는데, 그때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해서 책도 사보고 했었는데 그때는 그 개념이 잘 잡히지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포스트모던즘이라는 것이 사실은 나름의 자기 주장의 체계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기존의 가치관, 기존의 기준들을 부정하고 해체하려는 풍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해체주의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기존 기준이나 가치관들을 의심하고, 그것을 벗어난 다양한 해석의 시도들을 그렇게 부르는 것이지요.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고 확실한 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어떠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두고 공통된 주제에 대해 여러사람들이 이야기를 거론하는 소위 ‘담론’을 중요시하는 것이지요.
좋아보이는 측면이 있었지만 지나고 보니 사회에 부정적인 면으로 작용한 부분도 크지 않나 싶습니다. 누구나 아무렇게나 이야기 해도 책임도 없고, 부끄러움도 없고 기존의 가치관이나 체제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기만 하지 새로운 자신의 기준의 제시는 없이 말하자면 그저 앤티(Anti)에 머무는 것이지요. 그래서인지 지금도 배웠다 하는 사람들이 앞장서 책임도 대안도 기준도 없으면서 비판하는데만 익숙한 사회분위기가 팽배하게 되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나에 대한 비판은 드물고 타인에 대한 비판, 사회에 대한 비판, 국가에 대한 비판에 부지런합니다. 자기는 반성할 줄 모르고 그저 남을 살펴 비판하는 밖을 향한 시선으로만 마음을 쓰다보면 사람이 점점 어두워지고 부정적이 되어갑니다. 비판의 효과가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점점 더 사회를 투쟁의 극단으로 몰아가는 현상들을 보게 됩니다.
이런 포스트머더니즘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Critical Theory)의 영향으로 생겨났다고 합니다. 비판이론을 만든 것은 유럽내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들이 설립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입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역사가 발전할 수록 공산주의의 도래는 필연이다’라는 것을 절대 불변의 법칙으로 삼고 이론을 전개합니다. 산업이 발전할수록 빈부의 차이로 계급갈등이 커지고 결국 전쟁을 통해 공산주의가 도래하는 것은 필연이라고 믿는 것이지요. 그러나 1차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산업화가 덜된 러시아에서만 공산혁명이 성공하고 고도로 산업화된 유럽국가들은 오히려 공산화에 실패한 것에 충격을 받은 유럽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 원인 분석을 위해 프랑크푸르트 대학(Frankfurt University) 내에 설립한 것이 ‘Institute for Marxism’ 이고 이후에 ‘Institute for Social Reasearch’라는 완곡한 이름으로 바꿉니다. 이 연구소에서 공산혁명 실패 원인을 분석한 결론은 자본주의가 가져다주는 부유함과 풍요로움을 경험한 사람들은 공산혁명에 필수적인 계급의식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었고 이제는 경제적인 이유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계급의식을 대체해 혁명을 촉발시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프랑크푸르트 학파(Frankfurt School)라고 불리우게 되는데 이들은 나찌의 유대 공산주의자 탄압을 피해 1934년 미국 콜롬비아대학으로 이전해 공산주의 혁명을 위한 새로운 방법론을 생각해 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비판이론(Critical Theory)입니다.
비판이론이라는 것은 ‘비판을 위한 비판을 위한 정보선별’입니다. 일단 비판 대상을 정한 후 비판에 방해되는 정보는 전부 차단하고 왜곡 프레임을 씌워 다수에게 계급의식을 대체할 만한 혁명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예를 들면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창시자 중 한명인 에리히 프롬이 이런 주장을 합니다. “여성 남성의 차이는 생물학적 차이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남성중심적인 가부장적 문화에 기인한 것이다.” 남여의 생물학적 차이에 기인한 사고방식이나 경향성의 엄연한 차이는 다 제외하고 문화적 원인들의 영향들에 대한 정보들만을 들어서 해석을 하는 것이지요. 에리히 프롬의 이 주장은 여성이 남성과 동일하게 되기 위해 반드시 없애야 하는 문화와 단어들을 연구하는 이른바 Gender Study라는 새로운 학문을 탄생시켰고 이 학문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전투적인 페미니스트들을 양성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예로 프랑크푸르트 학파에서 가장 유명한 교수였던 매트 홀로위츠는 이런 주장을 합니다. “논리는 컨텐츠와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추론 방법인 논리와 내용인 컨텐츠는 별개의 개념이지만 이런 주장을 통해 엄연한 사실, 팩트 조차 공격을 가할 수 있게 됩니다. 엄연히 증명되고 옳다고 인정되는 사실에 대해서도 그것의 논리적 증명과정을 문제삼아 부정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TV 정치 토론을 보아도 본질인 컨텐츠에 대한 판단보다도 토론 과정상의 논리를 공격함으로써 촛점을 흐리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버젓이 실패한 공산주의를 옹호하고 성공한 자유민주주의의를 흔드는 도구로 이용되게 됩니다. 이런 주장에 넘어가 버리면 엄연한 사실을 놓고도 대중들은 긴가민가 하며 의심하고 휘둘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조는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영향을 끼쳐왔습니다. 전통적인 미덕들, 권선징악, 애국심등을 부정하고 공권력을 희화하고 범죄자, 적대국을 미화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서서히 가치관을 변경시켜 갑니다. 경찰관이나 정치인은 부패하고 게으르고 고집센 모습으로 묘사하고 범죄자 폭력배는 아주 매력적인 배우가 연기하면서 그런 저항적이고 반체제적인 모습들을 미화하는 영화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출판, 영화, 문화계의 이런 경향은 대중들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국민들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해 번번히 확신을 못하고 이런 저런 주장들에 휘둘리고 반체제적이고 국가에 위협적인 주장들도 다양한 의견에 대한 열린 마음이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흘려 듣게 됩니다.
순수한 학문적 열정으로 이런 철학을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결국 이런 계급투쟁을 촉발시켜려는 의도로 고안된 이론과 철학 사조들로 인해 사람들은 뭐가 옳은지 뭐가 틀린지도 모르는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그저 타인이든 정부든 사회든 비판하는 것이 올곧은 지식인으로 미화되고 스스로 그렇게 생활화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문화, 교육, 철학 등에서 그 권위를 부정하고, 그 비판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반대와 투쟁의 분위기를 조성을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다보면 중심이라는 것이 흔들리게 됩니다. 이런 비판을 다양성, 관용성이라는 미덕으로 포장을 하면서 사회의 중심을 무너져 갑니다.
요즘 사람들의 대화라는 것이 보면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모습은 드물고 누구 뒷담화하는 이야기, 누구 의심하는 이야기, 개탄하는 이야기, 그저 비판하는 이야기에 그치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렇게 남에 대한 비판을 통해 우월감을 느끼고 자존심을 챙길뿐 자기의 도덕적 사고적 체계가 서 있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이 없다는 것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열린 사고로 생각을 하고 자기 주장을 가진 사람을 편협하게까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자기 중심이 없는 사람들은 참 선동하기 좋은 대상들입니다. 체제를 전복시키고자 하는 입장에서는 그때 그때 체제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불러 일으켜 자기 편으로 이용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 현상들을 우리는 많이 보고 있습니다.
천지개벽경에 보면 이중성 선생님께서 서문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거든요.
@군사부난 천지지대강이요 군신부자형제부부붕우난 인도지대륜야니라.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라는 것은 천지의 큰 기강이고 군신 부자 형제 부부 친구 관계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큰 원리라는 말씀입니다.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라는 권위와 기강이 굳건히 서야 가정과 사회와 국가가 유지가 되고 안정이 될 수가 있습니다.
나뭇가지도 잎이 달리고 열매를 맺는 역할을 하는 것은 유연하고 부드러운 잔가지입니다. 수많은 잔가지들이 그렇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은 그 무게들을 굳건히 떠받치고 있는 딱딱하고 거칠고 유연하지 않은 줄기와 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줄기를 보고 잔가지처럼 유연하라고 하라면 송두리째 무너지게 됩니다. 사람도 조직도 마찬가지입니다. 공권력의 기강이 서야 질서가 유지되고 흔들리지 않아 그 속에서 자유롭게 개인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창의성을 뽐내며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런 조직과 사람의 생리를 제대로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왜 국가와 조직에 대한 충성이 필요한지를 절실히 느끼게 되거든요. 그런 경험없이 책상머리에서 관념적으로 말을 만들고 논리를 만들어 하는 생각으로 세상을 사는 우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교조주의적인 생각에 빠지면 쉽게 그런 선동에 동의하게 됩니다.
상제님께서 하신말씀 중에 보면
@ 하루는 종도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서양이 곧 명부라. 사람의 본성이 원래 어두운 곳을 등지고 밝은 곳을 향하나니, 이것이 곧 배서향동이라. 만일 서양사람을 믿는 자는 이롭지 못하리라." (대순전경 p143)
@ 천(天)이 이기예(以技藝)로 여서인(與西人)하여 이복성인지역(以服聖人之役)하고, 천(天)이 이조화(以造化)로 여오도(與吾道)하여 이제서인지악(以制西人之惡)이니라. (대순전경 p345)
서양사람에게는 기술로써 성인의 역할을 대신하게 해서 풍요롭게 하는 역할을 맡기셨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또 서양이 명부라 하셨듯이 서양의 사상이나 종교나 철학적인 바탕은 어둡고 냉냉하고 날카롭게 치우치는 경향성이 있기에 밝고 따뜻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그런 사상이 나오기가 힘들다는 말씀으로 이해가 됩니다.
금강산 독기를 공산주의에 붙이신 공사가 있습니다. 공산주의라는 관념적 올바름에서 나온 체제가 수많은 사람들을 굶어죽게 하고 인권을 탄압하며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자본주의적 질서속에도 그 마르크스주의에서 파생된 사회과학과 비판철학적 사조들과 그에 영향을 받은 문화현상들로 인해 사람들 사이가 냉냉하고 소원하며 사회적으로도 비판적이고 반체제적인 분위기, 투쟁의 분위기로 사람들의 생활을 오도하는 부분이 큰 것 같습니다.
상제님께서는 비인정이면 불가근이라고 하셨습니다. 상제님께서 설계하신 세상은 관념적 옳음을 앞세운 냉냉한 사회가 아니라 따뜻한 인정을 앞세워 서로 용서하고 보듬어 안는 사회분위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서양적인 것들에 있어서, 장점들은 배워야겠지만, 잘못된 사조들에 대해 우리가 생각을 정리를 해서 짚어주고 바로 잡아서 상제님의 진리를 이야기 해가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
'태을도인 도훈(道訓)'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대구법소 정유년 소한 치성: 그릇을 크게 키우자! (0) | 2017.02.16 |
---|---|
[스크랩] 수원법소 입춘(立春)치성 도훈 “혼돈탁세를 살아가는 방법” (0) | 2017.02.13 |
[스크랩] 2016년 12월 월례치성 대구법소 태을도인 도훈: 상제님께서 건설해주신 대한민국 우리나라 고마운 나라 (0) | 2017.02.11 |
[스크랩] 2017 입춘 태을도인 도훈 : "천지부모님이 원하시는 인간상" (0) | 2017.02.09 |
[스크랩] 2017년 1월 울산법소 입춘치성 도훈: 천하사 성공의 이윤(伊尹)도수 (0) | 2017.0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