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태을도 12월 월례치성 도훈
평화(平和)와 살림(生)
2016.12.25(음 11.27)
오늘 12월 월례치성을 끝으로 2016년 태을도 공식일정을 모두 마치게 되었습니다. 지난 1년 동안 천지부모님의 큰 은혜와 사랑 속에서 태을도인들이 천지부모님의 은혜와 사랑을 몸소 체험하고 체화해서 가족과 이웃에게 은혜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되어서 참으로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올 한해 남은 기간을 잘 마무리해서, 내년에는 천지부모님의 은혜와 사랑이 온 천지에 넘치고, 증산신앙인들이 귀가 열리고 또 눈이 틔어서 태을도에 모두 인연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일반 국민들도 천지부모님의 은혜와 사랑 속으로 전부 들어와서, 마음 닦고 태을주 읽어서 급살병의 병목을 넘길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오늘은 12월25일 크리스마스입니다. 예수의 성탄을 기념하는 물결이 전 세계적으로 넘치고 있습니다. 기독교나 천주교를 신앙하지 않는 일반 사람들도 신앙여부에 상관없이 예수의 사랑을 기리며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고 예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예수의 사랑을 우리가 한번 차분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상제님께서는 예수를 혁명을 했던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대개 예수는 하느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한 분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서까지 죄인을 용서하라고 그렇게 가르친 사랑의 화신으로 알고 있지만, 상제님께서는 예수가 가르친 사랑의 이면에는 혁명성이 있다고 짚어 주셨습니다.
이중성 선생이 찬술한 천지개벽경을 보면,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서양에서는 예수가 있었고, 동양에서는 전봉준이 있었느니라.” 예수도 혁명의 길을 걸었고, 전봉준도 혁명의 길을 걸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의 사랑(愛) 속에도 혁명성이 들어 있고, 전봉준의 시천(侍天) 속에도 혁명성이 들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동서양에서 구습을 혁파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서 가장 열렬히 혁명을 실천한 사람이 예수와 전봉준이라는 상제님의 말씀입니다.
예수가 사랑에 대한 말씀을 많이 했지만, 예수의 행적을 전하는 신약성서 마태복음 10장 34절부터 37절까지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너희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왔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나는 아들과 아버지, 딸과 어머니,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서로 다투게 하려고 왔다. 그러므로 사람의 원수는 자기 식구가 될 것이다. 나보다 자기 부모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자기 자식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적합하지 않으며...”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의 사랑 속에는 독기와 살기를 갊어둔 혁명의 씨앗이 심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공생활을 했던 초창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통해서 유대나라를 건설하겠다는 기대를 했습니다. 그 중에 열심 당원인 유다가 예수의 혁명성, 혁명의 열기를 믿고 로마로부터 유대를 독립시키는 작업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거기에 응하지 않았기에 유다의 혁명 열기는 꺾여버리고, 결국은 자살하고 맙니다.
예수의 공생애 중 어느 시점부터는 혁명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예수의 공생애 마지막으로 가게 되면 혁명의 씨앗을 거두어들이는 그런 언행을 하게 됩니다. 상제님은 예수가 심어놓은 혁명의 정신, 혁명의 열기, 혁명의 기운, 혁명의 씨앗을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가 사랑을 이야기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예수가 전한 그런 사랑과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강증산과 태을도 268쪽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성언 구절을 살펴보면,
@ 평화(平和)를 부르짖는 것도 일심(一心)으로 할 것이고, 인애(仁愛)를 설하는 것도 일심(一心)으로 할 것 같으면, 일심의 결과는 부르짖지 아니하고 설명하지 아니해도 이미 평화가 있을 것이요, 이미 인애가 있는 것이니라. (정영규의 천지개벽경 p261)
상제님의 사랑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원수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은인으로 봤을 때 평화로운 관계가 되고 평화로운 세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평화를 일심으로 부르짖고, 인애-어짊과 사랑을 일심으로 설하는 사람은, 가족에서부터 이웃으로부터 나라에 이르기까지 항상 평화적인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수를 은인으로 돌리겠다는 큰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평화로운 관계가 설정되지 않고 평화로운 세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평화를 주러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고 마태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들과 아버지, 딸과 어머니,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서로 다투게 하려고 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원수는 자기 식구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예수의 마음은 이해를 합니다. 어떤 큰일을 하기 위해서 가족들이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궁극적으로 평화로운 세상, 인애로운 세상, 하느님의 사랑이 넘쳐나는 세상을 만들려면 말을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상제님이 말씀하신 것과 예수의 말씀을 한 번 비교해보십시오. 예수가 가족을 대하고 가족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과, 상제님이 가족을 대하고 가족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보십시오. 상제님은 하느님의 사랑과 가족과의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괴이고자 하면, 먼저 내 부모를 괴이고, 나를 공경하고자 하면 먼저 내 형제를 공경하라. 가까운 것을 잊어버리고 먼 것을 능히 가까이 못하리라.”
예수가 ‘가족이 원수’라고 하는 반면에, 상제님은 ‘부모를 먼저 괴이고 형제를 공경한 다음에 나를 찾아오라’고 하셨습니다. 부모를 먼저 괴이지 못하고, 형제를 제대로 공경하지 못한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 하느님을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전한 하나님의 사랑과 증산이 전한 하느님의 사랑을 비교해보면 어떻습니까? 차원이 다르지 않습니까? 말은 마음의 소리입니다. 행실은 마음의 자취입니다. 예수의 마음속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과 딸과 어머니, 며느리와 시어머니를 서로 다투게 하려고 왔다 라고 하고, 사람의 원수는 자기의 가족이 될 것이라는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하느님의 사랑은 가족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가족이 반대를 한다고 가족이 이해를 하지 못한다고, 부모를 원수로 돌리고 자식을 원수로 돌리고 시어머니를 원수로 돌리고 시아버지를 원수로 돌린다면, 가정은 파탄이 나고 맙니다. 예수는 칼을 주러왔다고 했지만, 상제님께서는 칼을 거두라고 말씀하십니다. 상제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은 말하기를 돌로써 치면 돌이요. 떡으로 치면 떡이라 할 것이라, 그러나 너희들은 돌로써 치는 자에게 돌로 하지 말고 떡으로써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상제님께서는 칼과 몽둥이를 버리고 원수를 은인으로 돌려야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상제님께서 전봉준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 중에 “전봉준은 시천주(侍天主) 사명기(司命旗)를 못 받은 것이 포한이 되었다.”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전봉준 장군이 동학에 입도를 해서, 시천주의 마음으로 도탄에 빠진 이 나라를 구하고 시천주의 세상을 만들려고 했지만, 그 방법이 칼과 몽둥이와 같은 무력을 동원하는 폭력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에, 진정한 시천주의 정신을 실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모시는 것을 제대로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한다고 전했지만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고 말한 것처럼, 전봉준이 하느님의 진정한 사랑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실천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전봉준도 동학에 가입해서 시천주 수련을 하고 시천주 정신을 배웠지만, 칼을 들고 몽둥이를 들고 세상을 혁명하려고 했기 때문에 진정한 모심의 정신을 실천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전봉준 장군이 혁명에 실패해서 조정에 붙들려가 심문을 받았습니다. 1895년 법정 심문기록인 전봉준 공초(供招)를 보면 심문관이 질문하고 전봉준이 대답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심문관이 묻기를 “1894년 9월 다시 난을 일으킨 이유가 무엇인가?” 전봉준이 대답하기를 “일본이 개화라 칭하며 군대를 거느리고 우리 서울에 들어와 밤중에 왕궁을 공격하여 임금을 놀라게 하였다. 이에 초야의 선비와 백성들이 충군 애국(忠君 愛國)의 마음으로 의병을 규합하고 일본인과 접전하여 그 책임을 묻고자 하였다.”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전봉준 장군은 일본사람들이 군대를 동원해서 임금을 협박하고, 그래서 선비와 백성들이 충군 애국의 마음으로 의병을 규합해서 일본인과 싸웠다는 내용입니다.
아까 상제님 말씀처럼 세상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말하기를 “돌로써 치면 돌이요, 떡으로써 치면 떡이라 할 것이라.” 세상 사람들은 돌은 돌로 해줘야 되고, 떡은 떡으로 해줘야 하고, 이에는 이로 대한다는 것입니다. 상극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용인되어온 방법입니다. 그렇지만 상제님의 기준에서 상극세상을 마감하고 상생세상을 열려면,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 방법으로 대항하고 싸워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하느님을 모실 수 없고, 상생세상을 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상제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선천 상극세상의 상극지리 때문에 독기와 살기가 발생해서, 그 독기와 살기로 말을 하고 글을 쓰고 행동을 해서 일마다 척이 쌓이고 일마다 살이 붙어서, 결국에는 모든 사람을 원수로 만드는 무한투쟁의 장이 돼서, 결국에는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아수라장이 되고, 급기야 급살병이 들어와서 인류가 전멸당하게 생겼기에, 이를 해결하고자 오신 것입니다. 썩은 사회를 고치고 타락한 임금을 끌어내리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한다는 명목을 내걸었지만,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독기와 살기가 있기 때문에, 진정한 상생의 세상은 건설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되풀이 되풀이로 악의 씨앗을 뿌리는 계기를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상제님께서는 서양의 예수와 동양의 명숙이 백성을 위해서, 사랑의 이름으로 혁명을 했고, 모심의 이름으로 혁명을 하였지만, 예수와 전봉준의 혁명의 씨앗은 결국은 상극세상을 연장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상제님의 눈으로 보면 근본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한계를 알고 전봉준의 한계를 정확하게 알아야, 하느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하느님을 모시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평화는 두 가지 축으로 진행됩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 가정이요, 두 번째가 국가입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만고의 진리라고 상제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혁명을 하는 것도 수신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상제님 고수부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상생의 길을 가는 것도 수신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상제님께서는 가정의 평화를 깨뜨리는 가장 큰 것이 유부녀를 범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잉태되고 커지고 자리 잡는 기초 중의 기초가 가정인데, 그 가정에서 유부녀를 범하는 일이 생기면 그 가정이 깨어진다는 것입니다. 상제님께서는 “유부녀를 범하는 것은 천지의 근원을 떼는 것과 같아서 워낙 죄가 크므로 내가 관여치 아니하노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상제님께서는 부인에게 절을 3번씩 하라고도 하셨어요. 절을 3번씩 해가면서 부인을 안정시키고 공대하고 대접하라고 하셨습니다. 외간남자도 문제지만, 부인을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게 한 남편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존경하고 대접을 잘하면 외간남자와 관계를 맺을 이유가 없습니다. 가정에서 부인의 역할이 크듯이, 나라에서는 충신의 역할이 큽니다. 부인이 가정에서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면 가정이 깨어지듯이, 나라에서는 충신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면 나라가 깨어집니다. 상제님께서 가장 큰 죄는 가정을 깨는 죄와 나라를 망하게 하는 죄라고 하셨습니다.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켜서 당나라가 망하는 큰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가정에서 부인이 외간남자와 간통을 하거나, 나라에 충성해야 하는 관리들과 백성들이 적국과 합세하고 내통해서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똑같다는 말씀입니다. 수신을 제대로 하고 제가와 치국을 올바르게 해야 평천하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혁명의 방법으로는 가정도 안정시키지 못하고, 나라도 안정시키지 못합니다. 가정에서 부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나라에서 임금이 마음에 안 든다고 혁명적인 방법으로 난리를 치면, 가정도 망하고 나라도 망한다는 것입니다. 상제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재민혁세(災民革世)하는 혁명의 길을 가지 말고, 제생의세(濟生醫世)하는 상생의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제생의세의 상생의 길! 그 길을 역사상 가장 올바르게 제대로 갔던 사람이 단주(丹朱)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사랑도 전봉준의 모심도 결국은 백성을 살리기 위한 것인데, 상제님의 차원에서 보면 혁명의 씨앗을 심어서 재민혁세의 결과를 가져 오게 했다는 것입니다. 단주는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모심을 온전히 이해하고 실천을 해서 백성들을 진정으로 살리는 길을 가고자 꿈을 꾸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항상 손에 살릴 생(生)자를 쥐고 상생의 길을 가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상극의 세상에서 상생의 길을 가려고 했던 원조는 바로 단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제님께서는 단주에게 세운을 통할해서 도운을 열어가도록 천지공사로써 맡기신 것입니다. 상제님께서는 선천 상극세상을 살아온 마음을 바꾸라고 신신당부를 하십니다. 상제님 말씀을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 매양 천지공사를 행하실 때, 모든 종도들에게 "마음을 잘 닦아, 앞에 오는 좋은 세상을 맞으라." 하시므로, 종도들이 하루바삐 그 세상이 이르기를 바라더니, 하루는 신원일이 청하여 가로대 "선생이 천지를 개벽하여 새 세상을 건설한다 하신 지가 이미 오래이며 공사를 행하시기도 여러 번이로되 시대의 현상은 조금도 변함이 없으니, 제자의 의혹이 자심하나이다. 선생이시여! 하루바삐 이 세상을 뒤집어서 선경을 건설하사 남의 조소를 받지 않게 하시고, 애타게 기다리던 우리에게 영화를 주옵소서." 하거늘,
천사 일러 가라사대 "인사는 기회가 있고 천리는 도수가 있나니, 그 기회를 지으며 도수를 짜내는 것이 공사의 규범이라. 이제 그 규범을 버리고 억지로 일을 꾸미면, 이는 천하에 재앙을 끼침이요 억조의 생명을 빼앗음이라. 차마 할 일이 아니니라."
원일이 굳이 청하여 가로대 "지금 천하가 혼란 무도하여 선악을 가리기 어려우니, 마땅히 속히 진멸하고 새 운수를 열음이 옳으니이다." 천사 괴로히 여기사, 칠월에 원일과 두어 종도를 데리고 변산 개암사에 가사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서 부안 석교로 향하여 뿌리시니, 문득 그 쪽으로 구름이 모여들며 큰 비가 쏟아지고 개암사 부근은 청명하더라.
천사 원일을 명하사 "속히 집에 갔다 오라." 하시니, 원일이 명을 받고 집에 돌아간 즉 그 아우의 집이 비에 무너져서 그 권속이 자기의 집에 모여 있거늘, 원일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곧 돌아와서 천사께 그 사유를 아뢰니, 천사 가라사대 "개벽이란 것은 이렇게 쉬운 것이라. 천하를 물로 덮어 모든 것을 멸망케 하고 우리만 살아있으면 무슨 복이 되리오. 대저 제생의세(濟生醫世)는 성인(聖人)의 도(道)요, 재민혁세(災民革世)는 웅패(雄覇)의 술(術)이라. 이제 천하가 웅패에게 괴롭힌 지 오랜 지라, 내가 상생의 도로써 만민을 교화하며 세상을 평안케 하려 하노니, 새 세상을 보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오 마음을 고치기가 어려운 것이라. 이제부터 마음을 잘 고치라. 대인을 공부하는 자는 항상 남 살리기를 생각하여야 하나니, 어찌 억조를 멸망케 하고 홀로 잘되기를 도모함이 옳으리오." 하시니,
원일이 이로부터 두려워하여 무례한 말로 천사께 괴롭게 한 일을 뉘우치고, 원일의 아우는 그 형이 천사께 추종하면서 집을 돌보지 아니함을 미워하여 항상 천사를 욕하더니, 형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고는 천사께 욕한 죄로 집이 무너짐이나 아닌가하여, 이로부터 마음을 고치니라. (대순전경 pp45-47)
오늘은 크리스마스날입니다. 예수의 사랑을 생각하고 예수의 사랑을 배우고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러,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날입니다. 그렇지만 상제님께서는 예수의 사랑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시고, 예수의 사랑 속에는 혁명의 씨앗이 심어져 있다고 하십니다. 또한 우리 대한민국 사람이 정치가 마음에 안들고 사회가 마음에 안들고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전봉준 같이 혁명을 일으켜서 세상을 뒤집어 보자고 선동하고 외치고 있는 것을, 상제님께서는 그렇게 해서는 진정한 하나님의 세상, 진정한 사랑의 세상, 진정한 모심의 세상이 열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장은 시원할지 모르지만, 당장은 정권이 바뀌고 당장은 정치가 바뀔지 모르지만, 그 속에 심어진 독기와 살기가 또 다른 원수를 만들고 또 다른 적을 만들어서, 또 다른 복수와 투쟁을 유발한다는 것입니다.
상제님께서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악을 선으로 갚으라고 하시고, 상극의 마음을 고치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계십니다. “이제부터 마음을 잘 고치라,” 혁명으로 이 세상이 하느님의 세상이 되는 게 아닙니다. 예수의 혁명정신, 전봉준의 혁명정신으로 사랑과 모심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단주가 꿈꾸었던 제생의세하는 살림(生)의 정신, 상생의 정신이라야, 급살병에서 전 인류를 구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크리스마스가 ‘평화와 살림’에 대한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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