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봉광장

[스크랩] ‘믿음’ 위에 세운 세상이 가장 아름답다

태을세상 2014. 9. 13. 09:47

 증산의 ‘기다리는 믿음’과 예수의 ‘보지 않고 믿는 믿음’

 

(1) 어느 때나 백성은 깨달음이 늦고 투정은 재빠릅니다. 증산이 살던 때에도 그가 한 말을 오해하여 공연히 시끄럽게 구는 이들이 심심찮게 있었습니다.   

 

“동짓달 광찬이 개벽을 속히 붙이지 아니하심에 불평을 품어 항상 좌석을 시끄럽게 하며 가로되 ‘내가 집안 일을 돌보지 아니하고 여러 해 동안 선생을 따르기는 하루바삐 새 세상을 보자는 일이거늘 이렇게 시일만 천연함에 집에 들어가서 처자 권속을 대할 낮이 없으니 차라리 스스로 생명을 끊음만 같지 못하다.’ 하거늘, 상제님이 일깨워 가라사대 ‘개벽이란 것은 때와 기회가 있나니 마음을 눅여 어린 짓을 버리라. 사지종용도 자아유지하고 사지분란도 자아유지하나니 자방의 종용과 공명의 정대를 본받으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죽는 일을 장차 내게 보라.’ 하시니라”(대순전경 p404)   

 

 우둔한 자가 함부로 나서서 성깔부리며 ‘개벽이 왜 빨리 안 이루어지느냐?’고 투정했으니 증산이 보기에 참으로 가관이었을 겁니다. ‘개벽’이 뭔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그 좋은 개벽이 왜 빨리 안 오느냐?’고 보챘으니 아마도 개나 돼지가 생각났을 겁니다. 흙에 묻힌 숯덩이를 우연히 찾아낸 후 무슨 굉장한 먹이나 되는 양 덥석 물고 온 동네를 쏘다니는 개나 돼지가 떠올랐을 겁니다. 

 

 증산이 자연적인 목숨을 거두고 자기들의 곁을 떠나게 되자 추종자들은 더욱더 조급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 허비한 시간과 정력이 아까워서라도 못 떠나가겠다’는 오기가 발동하기 시작한 겁니다. 증산의 이승 반려자(21세 때 정치순과 결혼하여 딸 강순임을 낳은 적이 있으나 종교적 반려자는 아니었음)이자 초월세계의 동역자였던 고판례(高判禮: 보천교 교주 차경석의 이종누이로 증산 사후 증산의 가르침을 종교로 체계화시킴), 즉 고수부(高首婦)에게 막무가내로 졸라대기 시작했습니다. ‘언제쯤 개벽이 오느냐? 언제쯤 도통해서 신의 능력을 지니게 되느냐?’는 안달이었습니다.   

 

“고민환이 소시부터 고후비님을 수종하다가 집에 돌아와 있더니 어느 날은 문득 도통해 볼 생각이 들어서 모든 준비를 갖추니라. 이 때 고민환의 가문은 부자인지라 많은 돈을 가지고 산으로 들어가며 고후비님께 인사하고 갈 생각으로 찾아가 뵈옵더니 물어 가라사대 ‘너 어디를 가려느냐?’ 하시거늘 고민환이 전말을 말씀드리며 고하기를 ‘도통하기가 소원이어서 입산수도 하러 가는 길이온대 인사차 들렀나이다.’ 하였더라. 고민환의 말을 들으시고 한참을 바라보시다가 가라사대 ‘상제께서 도통 문을 닫았으므로 도통이 없나니 부질없는 짓을 하지 말고 너는 내 앞을 떠나려 하지 말라. 내 곁에 꼭 붙어 있으며 집이나 잘 보도록 하라. 그리하면 될 것이니라.’ 하시니라”(선도신정경 pp73-74)

 

“다음 날 기사(1929)년 삼월 이십칠 일에 익산군 삼담면 죽산리에 사는 도인 남상돈에게 대하여 가라사대 ‘네가 원하는 것이 도통이더냐?’ 하시니 남상돈이 ‘예, 소원하는 바 도통이로소이다.’ 하고 고하거늘 고후비님이 들으시고 가라사대 ‘도통을 원하지 말라. 네가 지성으로 신심만 잘 가지고 나가면 자연히 열릴 것이요, 쓸데 없이 허망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되리라.’ 하시더라. 그런데 그 뒤에 남상돈이 어느 부황한 사람의 말을 듣고 용담에 가서 술객과 만나 신통술을 배운다고 고생만 하다가 신통도 못하고 많은 금전만 소모하고 와서 고후비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음을 속으로 후회하며 고후비님께 문후를 드리니 고후비님이 먼저 아시고 가라사대 ‘내가 일찍이 너에게 경계한바 있거늘 어찌하여 깨닫지 못하고 허망한 생각으로서 일을 그르치느냐?’ 하시며 ‘그와 같을진대 하는 수 없느니라.’ 하시더라”(선도신정경 pp174-175) 

 

 인간과 초월세계를 이어주는 ‘다리’가 있어도 사람들은 웬만해서는 잘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저 급한 대로 점집이나 잡술(雜術)이나 귀신 부리기에 매달리기 쉽습니다. 초월세계에 대한 호기심이나 관심은 높아도 사사로운 욕심이 앞서 엉뚱한 길로 빠지고 맙니다.

 

 사람 자체가 변하지 않았는데 개벽이나 도통을 보게 된다고 대체 뭐가 변하겠습니까? 개나 돼지처럼 길에 떨어진 부스러기 음식이나 핥아먹으려 할 텐데 어느 세월에 심령이 밝아져 천지개벽의 조짐을 본다는 겁니까?

 

 증산은 고수부를 통하여 ‘믿음만 지극하면 저절로 알게 되고 자연히 들어가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게 있다면 바로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또 하나 어려운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언제 올지 모르는 때와 기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믿음과 기다림’에만 익숙해 지면 뭐든 못해낼 것이 없다는 것이 초월자들의 한결 같은 가르침입니다.

 

(2) 예수의 부활에 얽힌 이야기는 너무도 생생하여 마치 한 편의 잘 만든 영화를 보는 듯합니다. 부활이 이루어지기 전부터 온갖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당연히 예수를 죽인 유대교 지도자들도 ‘죽은 지 사흘만 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한 예수의 말을 전해 듣고 있었습니다.그들은 로마총독 본디오 빌라도를 찾아가 은밀히 건의했습니다.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마태복음 27.63-64)

 

 총독은 은밀히 찾아온 속국의 지도자들에게 너그럽게 동조해 주었습니다.

 

“너희에게 파수꾼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마태복음 27.65)

 

 그들은 그 즉시 무덤(존경 받는 공회원인 아리마대 지방의 ‘요셉’이 총독에게 간절히 부탁하여 예수의 시신을 가져다 자신을 위해 예비해 둔 새 무덤에 장사 지냈음)으로 가서 굴을 막은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도록 파수꾼들에게 지시했습니다.

 

 하지만 시체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무덤을 봉해 놓았던 연자맷돌 만한 돌덩어리도 옆으로 옮겨지고 말았습니다. 당황한 파수꾼들 중 몇이 예루살렘성에 들어가 대제사장들에게 자초지종을 긴급히 보고했습니다. 긴급 소집된 장로들이 함께 들어와 머리를 맞대고 숙의했습니다. 결론에 이른 그들은 파수꾼들을 불러 ‘돈을 많이 주며’(마태복음 28.12) 입 조심을 거의 협박조로 지시했습니다.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마태복음 28.13-14) 

 

 이후로 유대인들 사이에 ‘예수의 제자들이 일부러 시신을 훔쳐다 다른 곳에 놓고 부활했다고 거짓말하고 있다’는 식의 괴소문, 헛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나갔습니다. (마태복음 28.15)

 

 유대교 안식일인 토요일은 누구나 조용히 쉬고 있어야 했습니다. 예수를 따르던 여인들과 제자들도 당연히 토요일을 기도와 묵상으로 조용히 보냈습니다.

 

 일요일 새벽부터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예수가 일곱 귀신을 내쫓아 정상적으로 고쳐준 막달라 지방(갈릴리 서쪽 해변 마을)에서 온 마리아(누가복음 8.2)가 무덤에 왔다가 돌이 치워지고 시체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깜짝 놀란 여인들은 그 길로 달려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나이다.’(요한복음 20.2)라고 허겁지겁 말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말 대꾸할 새도 없이 황급히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요한이 먼저 도착하여 무덤을 들여다 보고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거친 숨을 몰아 쉬며 거침없이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시신을 쌌던 세마포가 가지런히 놓여있었습니다.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20.6-7)

 

 밖에 서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요한이 잠시 숨을 고른 후 무덤 안으로 들어와 모든 것을 직접 보고서야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믿었습니다. (요한복음 20.8) 하지만 성경에 적혀 있고 예수가 누누이 말한 ‘죽은 후 삼일 만의 부활’은 아직 믿고 있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20.9) 베드로와 요한이 풀이 팍 죽은 채 터덜터덜 ‘제 집으로 돌아간 뒤’(요한복음 20.10) 무덤 밖에는 ‘막달라인이라는 마리아’(누가복음 8.2)만 있었습니다. 울던 마리아는 허리를 굽혀 무덤 속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 때 그녀의 눈에 두 천사가 보였습니다. 한 천사는 예수를 뉘었던 머리 쪽에, 다른 한 천사는 다리 쪽에 앉아 있었습니다. 눈이 휘둥그래진 마리아에게 천사가 물었습니다. (요한복음 20.11-13)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마리아는 엉겁결에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 이니이다.” 마리아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다 보았습니다. 예수였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주여,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 가리이다.”(요한복음 20.14-15)라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그때 예수가 “마리아야!”하고 불렀습니다. 여인은 “선생님(랍오니)이여!”하고 대답했습니다. (요한복음 20.16) 예수는 눈물이 줄줄 흐르는 여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한복음 20.17)

 

 여인으로부터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나머지 제자들은 한데 모여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저녁 때가 되었지만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꼭꼭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그때 부활한 예수가 홀연히 나타났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한복음 20.19)

 

 예수는 자신의 손에 난 못 자국과 옆구리에 남은 창 자국을 보여주며 ‘부활한 예수’임을 믿도록 했습니다. (요한복음 20.20) 하지만 제자들 중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Thomas)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때가 한참 지난 후 그가 돌아오자 제자들이 앞 다투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 여기 이 자리에 오셨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도마는 냉담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한복음 20.25)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에 있을 때 도마도 마침 같이 있었습니다. 문들은 모두 꼭꼭 닫혀있었습니다. 한데 예수가 갑자기 그들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직접 말했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한복음 20.27)

 

 의심 많은 도마는 그 즉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요한복음 20.28)

예수는 조용한 음성으로 도마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한복음 20.29)

 

 예수의 제자들은 수시로 엉뚱하게 굴고 답답하게 놀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조금도 귀찮게 느끼거나 지겹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예수가 ‘십자가 고난과 그 후의 부활’을 자주 암시할수록 제자들의 대꾸나 질문은 실로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요한복음 14.1-4)

 

 도마가 퉁명스럽게 되물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습니까?”(요한복음 14.5; “Lord, we do not know where You are going, and how can we know the way?”)

 

 하지만 예수는 ‘모른다’는 도마의 말이 너무 당연하다는 듯 다시 설명해 주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요한복음 14.6-7;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If you had known Me, you would have known My Father also; and from now on you know Him and have seen Him.”)

 

 그러자 바로 곁에 있던 빌립(Philip)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한복음 14.8; “Lord, show us the Father, and it is sufficient for us.”)라고 엉뚱하게 졸라댔습니다. 예수는 속으로 무척 답답해 하면서도 참고 다시 설명해 주었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한복음 14.9-15)

 

 예수의 메시지는 늘 같았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자(使者)다.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다. 내가 하는 일을 보고 내가 하는 말을 들으라. 그러면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믿게 된다. 성경은 대체 무엇 하러 읽느냐? 그 속에 하나님과 나에 대한 이야기들이 자세히 나와 있지 않더냐?”

 

“어리석도다. 참으로 어리석도다. 숟갈로 입에 넣어 줘도 뭔지를 모르니 대체 무엇으로 눈 멀고 귀 먹고 마음 닫힌 것을 낫게 한다는 말이냐? 그렇게 자주 가르쳐 주고 자주 보여줘도 전혀 모르고 있으니 대체 어느 세월에 하늘나라 들어갈 준비가 되겠느냐?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통째로 바다에 처넣고 바람과 파도를 잠잠하게 할 수 있을 텐데 그 믿음이 부족하여 놓인 다리도 못 건너고 닦인 길도 제대로 못 찾는구나.”  

 

 무지(無知)보다 더 무서운 것이 의심입니다. 예수를 가장 괴롭힌 것도 바로 그 의심이었습니다. 마치 햇볕에 곡식을 말리면서도 태양의 존재를 전혀 믿으려 하지 않는 농부처럼 그 어떤 기적을 베풀고 신비로운 메시지를 전해도 도무지 믿으려 들지 않았습니다. 믿기는커녕 도리어 시험하려 들고 고발할 빌미를 만들어 죽일 죄인으로 내몰려 했습니다.

 

“내가 바로 그리스도다. 내가 바로 모세를 비롯한 그 많은 선지자들이 예언으로 알리고 믿음으로 선포했던 바로 그 메시아다. 하나님께서 직접 약속하시고 천사들을 시켜 누누이 예고했던 바로 그 구세주다.”

정말 무서운 세상이었습니다. 호랑이도 때려 잡고 사자도 목 졸라 죽이는 사람인지라 일단 그 살기가 한번 동하면 아무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습니다. 기적을 베푸는 명명백백한 초월자임에도 사람들은 떼지어 몰려다니며 독사의 혀로 헐뜯고 매의 눈으로 해칠 구실을 찾았습니다.

 

 낮에도 밤의 일을 꾸미고 성전에서도 살인을 모의했습니다. 민족의 축제를 맞이해서도 ‘하나님의 선물인 메시아를 죽여 없앨 궁리’에만 매달렸습니다. 끝내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저희의 죄 없는 후손에게까지 살인죄를 ‘저주의 상속’으로 대물림 하기를 소원하고 말았습니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태복음 27.25; “His blood be on us and on our children.”)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죽일만한 죄가 전혀 없는데 왜들 죽이라고만 우기느냐?”라며 백성 앞에서 물로 손을 씻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I am innocent of the blood of this just Person. You see to it; Mattew 27.24).”고 말했습니다.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저희의 살인죄를 뻔뻔스럽게도 저희의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떠넘겼던 겁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도 그 엄청난 죄 값을 후손들에게 그대로 대물림 하여 영원히 저주 받을 수 밖에 없도록 한 겁니다. 

 

(3) 증산은 ‘개벽에는 때와 기회가 따로 있다’며 조급해 하는 제자들을 너그럽게 타일렀습니다. 증산은 자신의 종교적 반려자이자 초월세계의 동역자인 고수부(高首婦)를 통해 ‘믿는 마음만 잘 간직하면 새로운 변화, 새로운 조화에 얼마든지 동참할 수 있다’며 이 길 저 길로 멋대로 헤매는 종도들을 꾸짖고 달랬습니다.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꼴이 되지 말란 법이 없습니다. 초월세계를 암시할수록 더 욕심을 앞세우고 초월적 단계로 넘어가는 방법을 가르쳐 줄수록 세상의 잣대로만 모든 걸 바라보려 합니다. 한데도 왜 세상의 여기 저기에 초월자들이 나타나 초월세계를 보여주고 가르쳐 주며 그 엄청난 초월세계로 ‘너희를 거저 초대한다’고 선포하고 약속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방적인 제안이고 일방적인 초대입니다. 직접 안내하고 동행하며 초월세계를 ‘못난 사람들’로 가득 채우려 합니다. ‘사람이 없이는 신들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인지’ 초월적 존재들의 가르침이나 약속은 너무도 너그럽기만 합니다.

 

 예수는 자신의 손바닥과 옆구리를 보여주고 만져보라 시키며 ‘얼른 믿어라. 제발 믿어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와 함께 그렇게 오랫동안 동거동락하고 주야로 동행한 너희들까지도 나를 그렇게도 못 믿느냐?”며 잠시 지친 표정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함부로 두드린 엄지손가락 굵기의 녹 쓴 쇠못이었습니다. 그 못으로 뼈가 부서지고 살이 흩어지도록 망치질을 했던 바로 그 흉측한 쇠 못이었습니다. 한데도 제자들은 그 쇠못에 밀려나간 예수의 손바닥 구멍을 보고자 했습니다. 숨이 다 끊어진 것을 확인해 놓고도 상투적인 짓으로 냅다 창으로 찔러 구멍을 내 놓은 그 옆구리 창 구멍을 보고 싶어했습니다. 제 손가락을 그 뻥 뚫린 구멍 속에 집어넣어 보고서야 믿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보고서도 좀처럼 믿으려 들지 않았습니다. 정말 독살스러운 심보들이고 악착스러운 의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생떼를 쓰는 멀쩡한 제자도 있었습니다 “길, 길 하지 마세요. 이제까지 들은 것으로도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내가 곧 길이니 따라오라’고 하면 어떻게 따라가겠습니까?”라며 엉뚱한 트집을 잡는 제자도 있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정말 확신합니다. 어디든 따라가겠습니다.”라며 호들갑을 떨었던 제자들입니다. “당신은 선지자들이 예고했던 바로 그 메시아입니다. 정말 믿습니다.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라며 제 발로 기꺼이 따라 나섰던 제자들입니다. “우리도 예수 따라 죽으러 가자!”며 호언장담하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걷고 문둥병자가 새하얀 눈처럼 낫는 것을 제 눈으로 지켜본 사람들이었습니다. 귀신 들린 자들이 멀쩡해 지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을 직접 전해들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 전체가 수 년간 예수의 이야기로 술렁이고 웅성거렸기 때문에 누구나 다 제 귀로 듣고   제 눈으로 확인한 표적과 기적이었습니다.

 

 달라야 합니다. 21세기 한민족의 마음가짐, 몸가짐은 그 때와 달라야 합니다. 아무리 우리의 몸 속에 증산이 나무랐던 조급증과 옹졸함이 깊이 배어있더라도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아무리 우리의 핏속에 예수가 고쳐주려 애썼던 불신과 편협이 뿌리 깊이 박혀 있더라도 이제는 확 달라져야 합니다.

 

 21세기 한반도의 화두는 통일된 한민족의 욱일승천(旭日昇天)입니다. 21세기 한민족의 화두는 동북아시아의 맹주로 우뚝 서서 세계평화와 인류번영을 앞장서서 이끄는 것입니다. 세계역사의 중심을 동북아시아로 옮겨 놓고 증산의 ‘생명 중심’과 예수의 ‘믿음 중심’을 한반도 가득히 채워놓아야 합니다. 새로운 인류의 힘 있는 리더가 되는 것이 바로 21세기 한민족의 숙명입니다.

 

 초월적 에너지가 유별나게 강한 곳입니다. 초월자들의 삶과 본보임이 지천으로 흩어진 땅입니다. 하늘과 땅이 가장 가까이 맞닿은 곳입니다. ‘새벽형 사람들’과 ‘아침형 사람들’이 힘찬 걸음과 뜨거운 입김으로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어 가는 ‘기적의 땅’입니다. ‘끼리끼리 주고 받던 정’을 ‘세상 전체로 퍼져나갈 큰 사랑’으로 바꿔놓는 별난 사람들입니다. ‘눈물과 한숨’을 삶의 에너지로 바꿔 돌덩이를 떡으로 만들고 흙더미를 쌀가루로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을 지긋이 눌러놓고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증산의 타이름 속에 21세기 상생 세상의 힌트가 들어있습니다. ‘세상을 생명 살리는 기운으로 가득히 채워야 비로소 개벽이 끝나고 후천선경이 시작된다’는 증산의 가르침 속에 21세기 한민족의 ‘참 기운’이 숨겨져 있습니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복 받는 길’이라는 예수의 가르침 속에서 21세기 휴매니즘의 싹을 틔울 ‘참 믿음’을 찾아야 합니다. ‘만져 보고 믿고 손가락을 넣어 보고 믿으라’는 예수의 ‘온몸 다 내어줌’에서 동북아시아를 세계사의 중심으로 만들 21세기 한민족의 특질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출처 : 태을도(太乙道) : 태을궁 용봉서신(太乙宮 龍鳳書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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