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 고쳐주고 공 안 내세운’ 증산의 마음과 ‘마귀의 시험 이겨내고 생명의 길을 선포한’ 예수의 마음
(1) 증산은 ‘생명을 살리고 북돋우는 기운’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생명기운이 넘치는 사람들과 생명기운이 샘솟는 땅이 바로 미래의 중심이고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측은하게 여기는’ 감성의 변화 정도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영혼의 세계와 육신의 세계가 완전히 일치된 차원을 ‘이상향’으로 여기고 세상 변화의 ‘마무리’로 보았습니다.
“종도들 중에 무슨 병고가 있어서 와서 아뢰는 자가 있으면 그 증세의 어떠함을 물으신 뒤에는 아무 법을 베푸심이 없어도 나으며, 만일 위경(危境)에 이른 사람이면 그 증수를 가늠하여 앓으시면 곧 나았나니, 가령 배 앓는 사람이면 문득 배 아프다고 한번 말씀하시고 머리 앓는 사람이면 머리 아프다고 한번 말씀하실 따름이니라. 그러므로 하루는 형렬이 여쭈어 가로되 ‘병을 낫게 하여 주시며 아이를 낳게 하여 주시고도 아무 말씀을 아니하시니 그 공을 알아줄 사람이 없겠나이다.’ 상제님 가라사되 ‘병만 낫고 아이만 낳으면 가할지니 공을 알게 할 필요가 있으리요, 공덕을 남에게 알게 하려는 것은 소인의 일이니라”(대순전경 p402)
“남의 말을 좋게 하면 그에게 덕이 되어 잘 되고 그 남은 덕이 밀려서 점점 큰 복이 되어 내 몸에 이르고, 남의 말을 나쁘게 하면 그에게 해사 되어 망치고 그 남은 해가 점점 밀려서 큰 재앙이 되어 내 몸에 이르느니라”(대순전경 p322)
“구릿골 이재헌의 아내가 병들어서 수년 동안 앓음에 수척하여 뼈만 남았거늘 재헌이 상제님께 와 뵈옵고 고쳐 주시기를 청하니 가라사되 ‘그 병은 병자가 평소에 남에게 욕설을 많이 하여 그 보응으로 난 것이니 날마다 회개하면 병이 저절로 나으리라.’ 재헌이 명하신 대로 그 아내를 효유하여 날마다 허물을 뉘우치게 하였더니 그 뒤로 곧 나으니라”(대순전경 p383)
증산은 ‘가난이든 질병이든 모두 다 제 할 탓’이라는 가르침으로 일관했습니다. ‘열심히 일하면 먹을 것, 입을 것, 쓸 것’이 생기고 ‘열심히 허물을 없애다 보면 자연히 병도 떠나가게 된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호들갑을 떨거나 공연한 살을 붙여 복잡하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일반 백성들의 수준에 맞추어 쉽게 가르치고 쉽게 낫게 해 주었습니다.
증산의 가르침으로 세상이 만일 더 나빠지고 더 시끄러워졌다면 그건 증산이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제 사사로운 욕심을 부려 초월세계의 경건하고 거룩함을 함부로 다뤘기 때문입니다.
질병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아파 보면 누구나 금방 압니다. 아무리 성성하던 사람도 금방 기가 꺾여 풀 죽은 모습이 되고 맙니다. 웃던 얼굴이 찡그려지고 환하던 모습이 기울어지고 어두워집니다. 향내 나던 사람이 갑자기 구린내를 풍기게 되고 모든 일을 트집잡고 허물잡기 시작합니다. 질병을 악귀의 짓으로 보는 것은 아픈 사람이 점점 더 추해지고 악해지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아프면 소망도 없어지고 용기나 지혜나 인내심도 다 사라집니다. 생명을 갉아먹는 무서운 ‘이빨’입니다. 생명을 해치는 더러운 ‘올가미’입니다.
증산이 상극과 상생을 대비하며 어서 속히 상생으로 돌아가야 생명이 제대로 숨쉬고 완전하게 제 기운을 다 발휘한다고 본 것은 ‘죽을 병에 걸린 말 못하는 아이의 그 죄 없고 허물 없는 고통’만 보아도 순식간에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무슨 공치사가 필요합니까? 훼방 받은 생명을 거들어주고 도와준 것뿐인데 무슨 공치사가 필요합니까? 생명을 덧입은 이가 생명을 잃어가는 이를 붙들어 세워주고 껴안아 일으켜 세워 준 건데 무슨 덧 말, 헛말이 필요합니까? 생명을 알고 더욱이나 그 생명의 근원을 아는 초월세계의 숨결이고 걸음걸이인데 풀잎 하나 물에 적시고 이슬 방울 하나 다시 풀잎에 묻혀놓았다고 무슨 공적이 되고 기적이 되겠습니까?
(2) 예수는 자기 보다 한 발 앞서 세상에 나타난 세례 요한을 찾아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요단강 강가에서 물로 세례를 주며 이야기 했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려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셔서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할 수 없다. 그분께서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마태복음 3.11-12)
예수가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자 앞으로 걸어 나오자 요한은 그만 깜짝 놀랐습니다. 한 눈에 그가 바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 예수인 것을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당신께 세례를 받아야 할 텐데 당신께서 제게로 오십니까?”(마태복음 3.14; “I need to be baptized by You, and are You coming to me?”)
예수는 세례 요한이 속하지 못한 세계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태복음 3.15; “Permit it to be so now, for thus it is fitting for us to fulfill all righteousness.”)
예수는 세례를 받고 곧 물에서 올라오며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함’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우뢰 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마태복음 3.17; “This is My beloved Son, in whom I am well pleased.”)
예수는 3년의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마태복음 4.1) 갔습니다.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금식했습니다. 물 한 모금 안 마시는 금식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죽은 일이 있습니다. 목숨을 담보로 한 ‘사생결단식’의 금식이었습니다.
마귀가 나타나 물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명령하여 이 돌들이 떡 덩어리가 되게 하라!’고 꼬드겼습니다. 예수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신명기 8.3)며 모세의 기록을 인용했습니다.
그러자 마귀는 두 번째 시험으로 예수를 예루살렘의 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라!’고 유혹했습니다. 마귀도 덩달아 성경구절을 인용했습니다.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시편 91.11-12)라며 교묘히 예수를 현혹시키려 했습니다. 예수는 다시 모세의 기록(신명기 6.16)을 인용하여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고 말하여 면박을 주었습니다.
마귀는 마지막으로 예수를 높은 산으로 끌고 가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유혹했습니다.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태복음 4.9)고 했습니다. 예수는 단호히 대답했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신명기 6.13).’고 단호하게 잘라 말했습니다. (마태복음 4.10)
예수는 세례 요한이 헤롯 대왕에게 붙잡혀 갔다는 말을 듣고 일단 ‘갈릴리로 갔다가 나사렛(Nazareth)을 떠나 스불론(Zebulun)과 납달리(Naphtali)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Capernaum)’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성경 기록자는 말합니다. 예수의 그러한 행동반경이 모두 이미 오래 전에 예언된 것을 이루는 것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선지자 이사야(Isaiah: BC770년 경-BC680년 경; BC722년,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 당한 후 남 왕국 유다를 배경으로 활동하다 므낫세 왕에게 순교 당함)의 예언(이사야 42.7)인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예수의 공생애는 ‘이 때부터’(마태복음 4.17) 시작되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예수의 첫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태복음 4.17;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였습니다.
지극히 평범합니다. 초월세계와 우리들 드잡이 삶, 해코지 삶 사이를 마음대로 오고 가는 초월자들의 걸음걸이는 너무도 평범합니다. 굶으면 고통스럽고 약해지면 시험 받고 유혹 당하게 마련입니다. 겉 모습만 사람인 게 아니라 아예 희로애락(喜怒哀樂)과 생로병사(生老病死)마저도 직접 덧입고 껴입었습니다. 목수 아버지 밑에서 서른 살이 되도록 나뭇결, 나무 냄새, 나무 먼지에 파묻혀 살았습니다. 같은 맥박에 같은 숨결을 지니고 함께 걷고 함께 끼니를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생각하는 것’과 ‘하고자 하는 일’이 달랐습니다. 언제나 생명 살리기 에 집중했습니다. 언제나 생명의 근원인 하늘나라를 알리고 하늘나라로 이어주기에 몰두했습니다. 하늘나라의 주인인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는 일을 가장 먼저 했습니다.
예수는 ‘영으로 나타난 하나님’인 ‘성령(聖靈; the Holy Spirit)의 인도를 받아 세 가지를 놓고 지독한 시험을 받아야 했습니다. 시험과목은 바로 ‘떡과 능력과 영광’이었습니다. ‘돌을 떡으로 만들어 주린 배를 채우라!’고 했습니다. ‘건물 위에서 뛰어내려 멀쩡함을 드러내 보이라!’고 했습니다. ‘마귀에게 절을 해서라도 온 천하의 지배자가 되어보라!’고 했습니다. 여러 번도 아니고 ‘딱 한번이면 족하다’고 했습니다.
‘떡으로만 배 채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혼을 살리고 살찌우고 눈 뜨게 해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성경을 들먹이며 초능력을 보여보라고 했지만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잘라 말했습니다. 사십일 간의 초인적인 금식으로 이미 파절이처럼 축 늘어진 허기지고 가라앉은 육신이었습니다. 한데도 끈질긴 마귀는 ‘나에게 절 한번 하고라도 온 천하의 주인이 되어보라!’고 귀엣말로 속삭였습니다. ‘너는 사탄이 아니냐?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경배하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시지 않으셨느냐?’며 오히려 단호한 음성으로 되물었습니다.
‘호의호식(好衣好食)과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바라는 것이 사람의 속성입니다. 재물과 출세를 탐내며 시기하고 모의하는 것이 사람들의 일상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가면이 약간씩 다르고 분 칠과 변장이 조금씩 다를 뿐 옷 속에 감춰지고 웃음 뒤에 가려진 본래의 기질은 다 똑같습니다.
하지만 철이 들어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하늘나라를 꿈꾸기 시작하면’ 많이 달라집니다. 육신의 욕망이 죽음으로 중도에 갑자기 끝이 나고 그 다음에는 초월세계를 주관하는 ‘보이지 않고 볼 수도 없는 어떤 손’에 송두리째 맡겨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아주 조금씩 변하기 시작합니다. 서서히 욕망의 족쇄에서 빠져 나와 가끔은 해도 보고 달도 보고 별도 찾을 줄 알게 됩니다.
그 때쯤이면 예수의 첫 설교인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워졌다!’는 말이 가슴을 촉촉히 적셔놓게 됩니다. 그 때쯤이면 ‘영혼의 떡이 따로 있다’는 사실에 눈 뜨게 됩니다. 그 때쯤이면 ‘하늘나라의 주인을 시험하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를 어렴풋이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 때가 조금 지나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곧 사람의 유일한 할 일’임을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초월세계에 속한 초월적인 차원의 일을 놓고’ 함부로 티격태격, 갑론을박(甲論乙駁)하지 않게 됩니다.
(3) 증산은 병든 자들을 고쳐준 후 ‘공을 알게 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소인배나 하는 짓이므로 초월세계에 속한 이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남에 대해 좋게만 말해도 당사자가 복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이 물 무늬처럼 퍼져나가 나중에는 엉뚱하게도 좋게 말한 나에게까지 그 복이 굴러온다’고 했습니다.
반대로 ‘남을 나쁘게 말하면 그에게 화가 미쳐 나중에는 눈덩이처럼 커진 화가 나쁜 말을 내뱉은 나에게까지 들이닥치고 만다’고 했습니다. ‘복은 복을 부르고 화는 화를 부른다’는 겁니다. 한데 그 화나 복이 말 한 마디에서부터 갈라지니 ‘절대로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겁니다. ‘뉘우치되 병을 치료하듯 하고 허물을 되돌아보되 숨긴 보물을 훔쳐보듯 자주 하고 자세히 하고 남몰래 하여, 끝내는 그 허물을 다 녹여 없애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는 초월세계의 심부름꾼에 불과한 세례 요한에게 자청해서 ‘물 세례’를 받았습니다. ‘옛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를 그대로 ‘이루려’ 일부러 세례를 받은 겁니다. 하늘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기뻐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이 신비한 빛을 타고 들려왔습니다.
곧 이어 목숨을 담보로 한 ‘단련’에 들어갔습니다. 목수 생활, 가정생활을 정리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일부러 ‘금식 기도를 통한 극도의 단련’을 택한 겁니다. 초월세계의 계획대로 따라 한 겁니다. 하늘나라의 청사진에 맞추어 질서 있게 절차를 밟은 겁니다.
거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다 겪게 되고 겪어야 하는 관문이었습니다. ‘호의호식을 바라는 마음, 권력과 영향력을 우러르는 마음, 타락과 멸망을 겁내지 않는 무서운 마음’이 최악의 조합을 이루면 결국엔 ‘신을 저주하고 마귀를 좇는’ 데까지 서슴없이 나서게 된다는 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증산이 지향하는 ‘생명의 세계’에서 21세기를 헤쳐나갈 휴매니즘을 건져내야 합니다. ‘세상과 우주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아야 생명이 제 기운을 마음껏 드러내게 된다.’는 증산의 가르침 속에서 통일한국의 청사진을 상상해 보아야 합니다. 초월세계에서 바라다 보면 그깟 백 년, 천 년이 뭐 그리 지루하겠습니까? 사람의 일생에 초점을 맞추면 조급하기 마련이지만 ‘신들의 차원, 초월자들의 눈 높이’에 맞추면 통일한국은 벌써 우리 손에 들어와 있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게 아닙니다. 곧 다가올 장면이므로 얼마든지 미리 볼 수 있습니다.
준비해 둬야 합니다. 생판 다른 이들을 집 안에 불러들이고 함께 먹고 잘 준비를 미리 해 둬야 합니다. 매맞고 있는 이웃집 사람들을 모른척한 채 혼자만 배불리 먹고 있었던 쪽이 훨씬 더 잘못 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배곯고 헐벗은 채 이웃나라를 정처 없이 떠돌고 있는 동족을 모른 채 하고 끼리끼리 뭉쳐 산 사람들이 뼛속 깊이 병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증산의 눈으로 ‘사람을 보고 생명 살릴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의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보고 삶과 죽음을 초월한 하늘의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거인과 뱃사람 사이에 집 짓고 가개 연 후 먹고 살아야 할 숙명입니다. 먼 나라 군대가 와서 수십 년 나라를 지켜준 것이 바로 숨길 수 없는 우리의 숙명이고 몰골입니다.
설명이 다 안 되고 이해가 제대로 잘 안 되는 현실에 묶이고 얹혀 한 세기 이상을 살아온 우리입니다. 헐벗은 형제가 수천 만 명이나 되는 심각한 팔자입니다. 숫자부터 다시 가르치고 호칭부터 다시 외우게 해줘야 할 판입니다. 기억을 모두 지워 없앤 뒤 첫 페이지부터 다시 쓰고 첫 마디부터 다시 가르쳐야 겨우겨우 얼굴을 맞댈 수 있을 겁니다. 숟가락질, 지게지는 법부터 찬찬히 다시 가르쳐야만 한솥밥 먹으며 한 조상 같이 바라볼 수 있을 겁니다.
'용봉광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한마디 그 말 (0) | 2014.09.16 |
---|---|
[스크랩]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0) | 2014.09.16 |
[스크랩] ‘믿음’ 위에 세운 세상이 가장 아름답다 (0) | 2014.09.13 |
[스크랩] 가슴앓이 (0) | 2014.09.12 |
[스크랩] 마음의 눈높이 (0) | 2014.0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