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봉광장

[스크랩] 몸은 낮출수록 더 커 보인다

태을세상 2014. 9. 5. 20:59

 ‘낮고 모자란 이 우러르고 높여준 증산’과 ‘갈 바를 모르는 양떼를 살리려 기꺼이 목숨 바친 예수'   

 

(1) 증산은 몸은 비록 고루한 신분사회에 속해 있었으면서도 차별이 없는 온전한 세상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주위의 놀라움이나 두려움을 상관하지 않고 몸소 그 무차별의 열린 사회를 실천해 보였습니다. 선각자를 넘어서 초월자였기에 비로소 가능했을 겁니다.

 

“상제님께서는 비록 미천한 사람을 대할지라도 반드시 존경하시더니 형렬의 종 지남식에게도 매양 존경하시거늘 형렬이 여쭈어 가로되 ‘이 사람은 나의 종이오니 존경하지 마소서.’ 상제 가라사대 ‘이 사람이 그대의 종이니 내게는 아무 관계도 없느니라.’ 하시며 또 일러 가라사대 ‘이 마을에서는 어려서부터 숙습(熟習)이 되어 창졸간(倉卒間)에 말을 고치기가 어려울지라도 다른 곳에 가면 어떤 사람을 대할지라도 다 존경하라. 이 뒤로는 적서(嫡庶)의 명분과 반상(班常)의 구별이 없느니라”(대순전경 p102)

 

 ‘개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속담처럼 시대나 인습이 문제가 아니라 결국은 어떤 심성, 어떤 심령이냐가 보다 중요한 듯합니다. 증산의 모범적, 선도적 삶에서 훤하게 드러납니다. 선각자는 모순에 맞닥뜨려 가슴앓이를 할 뿐입니다. 하지만, 초월자는 아예 그 시대와 경계를 훌쩍 넘어서서 만고불변의 중심질서를 직접 실현해 보입니다.

 

 누구나 다 아는 ‘종’을 두고도 벗으로 대우할 수 있습니까? 다들 손가락질하는 첩의 자식을 놓고 다들 보는 앞에서 적자와 똑같이 높여줄 수 있습니까? 대대로 이어져온 상놈의 집안을 양반과 동등하게 보아줄 수 있습니까?

 

 증산은 인륜의 도리가 깨지고 나라의 기운이 쇠할 때에도 만고불변의 진리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한반도를 한낱 ‘마을’로 대하며 산과 바다 너머에 펼쳐진 세상 전체를 한 눈에 보고 있었습니다. 인습과 제도에 갇혀 사는 것이 가장 편한 삶인데도 증산은 그 속 편한 수용과 안주를 마다한 채 우주의 질서와 우주의 시간 속에서 자유로이 활보했습니다.

 

 높은 자를 존경하고 숭배하는 것은 어린아이도 하고 무식쟁이도 하고 살인 강도도 합니다. 강한 자, 부유한 자, 잘난 자 앞에서 부러워 섬기고 두려워 엎드리는 것은 짐승도 할 줄 압니다.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훨씬 더 잘합니다. 술이나 밥이나 돈이 생기지 않아도 웬일인지 아주 잘 합니다. 종을 섬기는 일은 아무리 연습을 해도 잘 안 되는 법입니다.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을 보란 듯이 섬기고 우러르는 것은 평생 도를 닦아도 잘 안 될 겁니다.

 

 증산은 자신이 몸소 실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제자들에게 ‘존경하라. 차별하지 말라. 공평무사하게 예우하라’고 역설했습니다. 나라도 감히 할 수 없는 엄청난 파격이고 개혁입니다. 그 자체가 개벽이고 상생이고 후천선경이었습니다.

 

(2) 예수의 가르침은 일반 상식을 넘어 너무 기이했습니다. 오죽하면 그 많은 기적을 행하고 그 많은 난치병자들을 즉시, 즉시 낫게 해 주었는데도 항상 ‘이 사람이 과연 누구냐? 이 사람이 보여주는 표적이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이냐?’하며 옥신각신 논쟁을 벌였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귀신 들려 미쳤다’(요한복음 10.20; “He has a demon and is mad. Why do you listen to Him?”)고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말은 귀신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요한복음 10.21; “These are not the words of one who has a demon. Can a demon open the eyes of the blind?”)고 반문하기도 했습니다.

 과연 어떤 말을 듣고 예수를 귀신 들린 자로 치부하려 했겠습니까? 선한 목자에 관한 설교(요한복음 10.1-18)였습니다.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한복음 10.1-5)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오, 내게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해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한복음 10.7-18)

 

 목자와 양을 비유로 하늘나라의 비밀을 풀어주어도 예수를 죽이기로 마음먹은 이들은 막무가내로 달려들었습니다. ‘너희가 죽이려 한다고 죽일 수 있는 내 목숨이 아니다. 내가 내 뜻으로 버렸다가 다시 얻을 수 있으니 너희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제 이마 높이 이상을 도저히 볼 수 없는 속 좁은 사람들인지라, 꽉꽉 닫힌 돌덩어리, 쇳덩어리 행세를 마치 신주단지처럼 붙들고 있었습니다.

 

 듣기는커녕 도리어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요한복음 10.24; “How long do You keep us in doubt? If You are the Christ, tell us plainly.”)라며 눈 부라린 채 막무가내로 사납게 대들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한복음 10.25-30)

 

 그래도 예수에 대한 고정관념을 갖고 있던 유대교 지도자들과 그들의 앞잡이들은 그저 한사코 죽여 없앨 궁리에만 매달렸습니다. 아니, 한술 더 떠 아예 당장 예수를 돌로 쳐 죽이고자 주먹만한 돌멩이들을 들고 예수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예수는 전혀 동요되지 않은 채 오히려 따끔하고 간결하게 되물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요한복음 10.32; “Many good works I have shown you from My Father. For which of those works do you stone Me?”)

 

 그들은 돌멩이를 움켜쥔 채 똑바로 노려보며 대답했습니다.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요한복음 10.33; “For a good work we do not stone You, but for blasphemy, and because You, being a Man, make Yourself God.”)

 

 예수의 답변은 듣는 이의 눈 높이에 맞춘 것이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하늘나라에 대한 아주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소개였습니다. 죽이려고 달려드는 이들에게조차 두려워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일목요연 하고 간결명료 하게 하늘나라의 소식과 정보와 법칙을 그려 보이고 햇빛에 비추어 보였습니다.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神)이라 하였노라(시편 82.6; “I said, ‘You are gods.’”).’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神)이라 하셨거든(if He called them gods),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You are blaspheming).’ 하느냐?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한복음 34-38) 

 

 예수는 참으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주고 드러냈습니다. 병자들을 고쳐주고 귀신 들린 자들을 낫게 하며 하나님의 권능을 엿보게 했습니다. 파도를 꾸짖고 바람을 잠잠하게 명령함으로써 창조가 ‘말씀’으로 다 이루어졌음을 어렴풋이 눈치채게 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썩은 시체를 다시 걷게 하여 하늘나라의 비밀을 슬그머니 들춰 보였습니다. 보리떡 몇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수천 명을 배불리 먹게 하여 ‘배곯지 않을 양식이 어디서 오는가?’를 재빨리 눈치채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왜 죄인이 되어 처참하게 죽어야 하는지’를 기회 있을 때마다 알려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람을 ‘양떼’로 바꾸고 하나님을 ‘목자’로 옷 갈아 입혀 자상하고 비장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겉으로 드러내기에 바쁜 거짓 지도자들, 거짓 스승들을 ‘사나운 이리떼’로 빗대어 말하며 세상의 참 모습을 속속들이 들여다 보게 했습니다.

 

(3) 증산의 ‘만인평등이념’과 ‘만인등가사상’을 곰곰이 되씹어보아야 합니다. 그 많은 글과 말이 강물처럼 이어져 왔는데도 우리는 여태 진정한 담론 하나 제대로 갖고 있지 못합니다. 증산이 주고 간 메시지가 있고 증산이 가르쳐 준 초월세계의 비밀이 골방 가득 채워져 있는데도 사나운 자가 먼저 먹고 거친 손이 먼저 채가는 꼴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노인과 임산부와 어린이를 위한 지정석 하나 제대로 못 지켜내는 엉터리 ‘마을’입니다. 개 짖는 소리와 애 우는 소리를 완전히 혼동한 채 뭐가 뭔지 모르고 사는 이들이 너무 많은 ‘이상한 마을’입니다. 올망졸망한 공동주거시설의 한밤중과 새벽은 도깨비천하입니다. 발 구르며 뛰어다니는 그 무수한 잡소리들이 전등불빛을 따라 매일매일 미칠 듯이 춤을 춥니다. 정말 ‘어지러운 마을’입니다.

 

 증산을 가슴 아프게 했던 차별투성이의 ‘마을’은 아직도 우리 주위에서 뭇 영혼과 삶을 그치지 않고 좀먹고 있습니다. 이미 먼먼 옛날 옛적에 ‘존경하라. 다 같은 사람인데 무슨 위 아래가 있느냐?’고 가르쳤지만 아직도 그 가르침은 전혀 싹을 틔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앞서간 선각자가 아닙니다. 증산은 ‘저 멀리서 제자리 걸음을 하며 서성거리고 있는’ 후천선경세계를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미리’나 ‘앞서간’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고 그리는 차원이 달랐던 겁니다. 증산은 그가 마땅히 속해야 할 초월세계에 살고 있었고 그가 꿈꾸는 후천세상에 미리 가 있었습니다.  

 

 예수는 세상의 온갖 시비와 소란에 철저하게 에워싸여 있었습니다. 그가 산 세상이 바로 사람들이 운명적으로 살아가는 흙이고 숙명적으로 살아가야 할 땅이었습니다.

 

 참으로 답답한 사람들이고 용서 못할 세상이었습니다. 가르치고 이끌수록 오히려 대들고 치받았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라고 시키면 풀섶에 앉은 모기나 바라보고 구들장에 앉은 파리나 지켜 보았습니다. 신비에 싸인 하나님의 세계를 설명하면 ‘어디 한번 속 시원하게 보여줘 봐라!’하며 팔 걷어붙이고 달려들었습니다. ‘떡으로만 살 게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기껏 일러주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만 줄곧 매달렸습니다.

 

 양떼가 아니라 이리떼였습니다. 양은 몇 마리 안 되고 온통 사나운 이리떼였습니다. 선한 목자를 반갑게 맞이하기는커녕 도리어 도둑과 강도로 몰아 허겁지겁 내쫓기에 바빴습니다.
기적도 소용없고 사랑과 치유도 아무 소용 없었습니다. 그렇게 줄기차게 가르쳐도 돌아서면 냉랭해져 등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죽음을 이야기 해도 귀담아 듣지 않고 부활을 가르쳐 주어도 전혀 눈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가면서도 하늘나라와의 관계를 보여주고 들려주었습니다. 함께 못박혀 죽는 살인강도를 천국에 동행하겠다고 약속하면서까지 하늘나라의 비밀을 들려주고 하늘나라의 열쇠를 거듭해서 빈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길 잃은 한 마리 양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회개하는 죄인이 있을까 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지도층의 무능과 폭력으로부터 어리석은 대중을 구하고자 죽도록 그렇게 했습니다. 외로워 넘어지고 괴로워 떨어질까 염려되어 그렇게 했습니다. 하늘나라에 속한 ‘택함 받은 자들, 남은 자들’을 마저 건질까 해서 쉼 없이 그렇게 했습니다

 

 증산의 ‘모든 사람 존경하기’와 예수의 ‘양을 위해 목숨버리기’만 제대로 가르치면 눈 뜬 사람을 온 나라에 가득히 채워놓을 수 있습니다. 예의를 바로 세우는 일 따위에 감히 견줄 수 없을 만큼 큰 가르침이고 비장한 발자취입니다. 인습을 완전히 벗어 던지고 자유롭고 활달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21세기형 사람들’로 온 세상을 빼곡히 채울 수 있습니다.   

출처 : 태을도(太乙道) : 태을궁 용봉서신(太乙宮 龍鳳書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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