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을도 도훈(道訓)

[스크랩] 태을도 2017년 8월 월례치성 도훈 : 개벽도통신앙과 심법생활신앙의 차이

태을세상 2017. 8. 30. 23:24

태을도 20178월 월례치성 도훈

개벽도통신앙과 심법생활신앙의 차이

2017. 8. 26 (음력 7. 5)

 

 

 

 

충양도인께서 수행하고 공부하고 깨치고 이해하신 것을, 현 정세와 더불어서 우리 태을도인들이 어떻게 신앙을 하고 생활을 해나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잘 정리해주셨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무실역행(務實力行)을 강조하셨는데, 무실(務實)이란 성실하게 진실하게 자기 직분에 충실히 임해야 된다는 뜻이고, 역행(力行)은 행함에 힘써야 된다 실천해야 된다 이런 뜻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항상 무실역행을 강조하셨습니다. 얼마나 이 분이 명실상부하게 처신했느냐 하면, 모든 것의 시작은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약속이 우선이라는 거예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어떤 소년하고 약속을 한 적이 있었대요. 그 소년한테 돈을 좀 지원해주기로 했는데, 마침 그때가 임박해서 그 정해진 장소 정해진 시간에 가려고 그러니까 주변사람들이 다 말리는 거예요. 일본경찰한테 정보가 들어가서 거기 가면 체포당해 감옥에 가십니다. 가시면 안 된다고 그러니까, 도산 선생은 그 소년이 지금 나를 절실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그럼 그 소년은 어떻게 되느냐? 내가 틀림없이 간다고 약속을 했다.” 그러면서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약속장소로 가서는 그 소년을 만나 돈을 주었대요. 그 정보를 알고 있던 일본경찰이 안창호 선생을 체포해 국내로 소환했어요. 중국에서 잡힌 게, 그 소년하고 약속한 걸 지키려고 하다가 그렇게 된 거예요. 그후 대전 형무소에 수감되어 온갖 고초를 당하셨지요.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가 목표를 세우고 목적을 가지고 일하려면 말이 아닌 실천이 필요합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조선 사람들한테 실천이 없다고 지탄을 많이 하셨거든요. 유학(儒學)의 폐해로 허례허식에만 기울고 공리공론(空理空論)만 치중해서, 말로는 못하는 게 없지만 실질적으로 실속있게 실천을 못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라를 빼앗겼으니, 말을 앞세우지 말고 자기가 목적을 가지고 목표를 세웠으면 목숨 걸고 실천을 해라, 그걸 항상 강조했어요.

 

그래서 어떤 목적과 목표를 바탕으로 한 사실적인 행위가 있어야겠다는 거예요. 첫째가 사실이 있어야 돼요, 내가 실천하는 사실. 둘째, 그런데 그 사실이 진실성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냥 보여주기식이나 땜방식은 안 된다는 거예요. 내가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실천을 할 때에는 그 사실이 진실해야 된다는 거예요. 진실해야지 그 사실이 내가 추구하는 목적과 목표에 도움이 된다는 거예요. 건성건성 한다든가 그냥 보여주기식으로 한다든가 정성을 드려서 하지 않는다든가 그러면 진실성이 없는 거예요.

 

사실적이면서 진실어린 실천이 있어야 되겠고, 그 다음엔 셋째 그것이 성실하게, 성실한 자세로 실천이 되어야겠다. 실천하되, 성실하게 해야 된다는 거예요. 성실하다는 것은 정성으로 꽉 차있다는 거예요. 성실은 정성으로 충만한 것이고, 진실한 것은 참으로 충만한 거예요. 사실이라는 것은 그 일 자체로 가득 찬 거예요. 그 순간에 그 일에 온전히 마음을 써야 그게 사실이 되는 거예요. 어떤 일에 있어서 우리가 사실과 진실과 성실로 충실했을 때 결실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천하사를 함에 있어서, 실천하는 사실이 있어야 되고, 그 실천하는 사실에 진실하고 성실하고 충실하게 임했을 때 상제님이 말씀하신 길화개길실(吉花開吉實)의 결실을 맺는다는 거예요.

 

오늘 8월 월례치성의 우리 5분 도훈 주제가 개벽도통신앙과 심법생활신앙의 차이는 무엇인가?’입니다. 증산종단 백 년 동안에 개벽과 도통신앙에 치중하다 보니, 어떻게 보면 공리공담(空理空談)으로 흘렀다고요. 상제님 고수부님이 원하고 뜻하시는 본래의 사실에 입각하지 않고, 자기 임의대로 자기 사적인 이익을 앞세워서 일을 도모했어요. 그러니 현실 속에 상제님 고수부님이 보아놓으신 천지공사와 신정공사의 사실적인 내용이 스며들지를 못했어요. 물 위에 기름 뜨듯이 둥둥 떠다녔다고요. 물 따로, 기름 따로 같이 되었어요. 일 년을 가든 오 년을 가든, 십 년이 가든 백 년이 가든, 개벽과 도통신앙은 상제님 고수부님의 마음이 담긴 사실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천지부모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천지공사를 보시고 신정공사를 보신 것은, 현실 속에서 진리를 뿌리내리는 거예요. 그게 성사재인이거든요. 성사재인은 현실을 태평천하한 세상으로 만들어나가는 거예요. 증산신앙인이 들어서 인간개조 인간사업을 제대로 했더라면, 상제님 고수부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해서 성인이 나와도 몇 천 명이 나왔을 거예요.

 

지금까지 상제님 고수부님 제자들 중에서 세상사람들이 감동하고 감격하고 본받을 만한 증산신앙인들이 나왔느냐 이거예요. 물론 종도들과 선배신앙인들이 일심혈심으로 노력했지만, 자기 스스로 인간개조 인간사업에 사실적으로 진실하고 성실하게 충실하게 해서 길화개길실하게 결실을 못 맺었기 때문에, 상품의 완성도가 떨어졌다 이거예요. 상품(商品)으로 말하면 하품(下品)이 되어버렸다 이거예요. 신령스러움이 가득 하고 도덕성이 가득 차고 외교성이 가득 차고 진리성이 가득 찬, 인간으로서 최고의 상품이 되어야 되는데, 세상사람들한테 인정받지 못하는 인품과 도격으로, 세상사람들로부터 저 사람들은 개벽과 도통만 쫓다가 가정도 망치고 사회도 망쳤다. 직장도 망쳤다. 나라에 분란거리만 제공했다.’ 이런 소리만 들었다고요. 안창호 선생이 무실역행을 강조했는데, 가정에서도 진실하고 성실하게 충실하게 실속이 있어야 하고, 직장에서도 진실하고 성실하고 충실하게 실속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가정과 직장에서도 실천에 실질이 있어야 되고 정성을 다해야 된다는 거예요.

 

개벽도통신앙에서 심법생활신앙으로 간다는 것은, 우리가 현실 속에서 인간개조 인간사업에 모범을 보여서, 모든 일을 사실적으로 진실하게 충실하게 해서, 상제님 고수부님이 원하는 인격과 도격을 갖춘 명실상부한 태을도인으로 재생신되어서, 인간 중의 인간인 인간 최고의 상품으로서 진리를 갖춘 인간이 되라는 거예요.

 

, 오늘 돌아가면서 개벽신앙 도통신앙과 심법신앙 생활신앙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을 간단히 얘기하도록 합시다. 먼저 충희도인님부터 시작하시지요.

 

 

충희도인 :

 

저의 신앙의 역사를 반성해보면 태을도에 입도하기 전에는 개벽신앙, 의통신앙 중심이었다면, 태을도에 입도하고 나서는 심법신앙, 생활신앙 중심으로 변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같은 상제님과 수부님을 신앙했지만 신앙하는 행태는 커다란 차이가 있어요.

 

태을도에 입도하기 전에는 개벽, 의통 이런 주제에 집중하니까, 마음이 들뜨고 안정이 잘 안되었던 것 같아요. 이슈에 따라서 또는 지도자의 말씀에 따라서 중심이 흔들려 우왕좌왕하고 그랬습니다. 정세의 변화가 일어났을 때, 저 자신부터 중심을 잡지 못하고 부평초라고 할까요? 안정되지 못하고 떠다니는 듯한 그런 신앙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주위사람들 보기에 조금 이상하다.’ ‘왜 저렇게 불안감을 조성하지?’ 이런 생각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주위 사람들이 그러면 언제 개벽되는데?”이렇게 물어보는 거예요. 제가 신앙활동하러 어디 간다.” 이렇게 말하면 주위에서 보는 시선이 저거 위험한데...’ 이런 것이었어요. 아마도 개벽과 의통을 중심으로한 기존의 증산신앙의 모습을 봐왔던 사람들의 일반적인 평가가 그런 것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을 살리려고, 남을 도와주려고 그런 것인데 그런 반응이 대부분이니, ‘세상 사람들이 나를 몰라주네. 사는 진리를 몰라서 참 안타깝다.’이런 생각을 하면서 밖으로 나가다녔는데, 실상은 저조차도 저 자신을 완벽하게 다스리지 못하면서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에게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키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 자신도 혼란에 빠지고, 가정도 혼란에 빠지고, 세상도 혼란에 빠지게 하는 역할이 더 많았던 것 같아요.

 

태을도에 들어와서는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데 더 많은 집중을 하게 되었는데, 그러니까 사람들이 특히 직장 동료들이 제가 뭔가가 변했다고 하는 거예요. 제가 태을도 한다고 먼저 얘기하지도 않았는데, “민 팀장님이 뭔가 변화가 일어난 것 같아요.” 이러는 거예요. 제가 어떻게 변한 것 같은데요?” 물으니, 사람이 좀더 온화해진 것 같다는 거예요. 그전에는 천지가 어떻게 되고, 상씨름이 어떻게 되고 병겁이 어떻게 되고 의통이 어떻게 되고 이런 식으로 나갔는데, 태을도에 들어와서는 일체 그런 이야기를 안했거든요. 그래도 사람들이 저를 보고 있었던 거예요. 제가 생활하면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주위에서 살펴보고 있었다는 것을 느꼈어요. 이것이 바로 심법신앙이고, 이런 식으로 심법신앙이 성숙하는 길이 바로 성인의 도로 가는 것이구나! 이런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과거에는 칼 들고 총 들고 세상으로 나갔다면, 지금은 나 자신을 먼저 다스려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런 길로 가는 거구나! 이런 것을 조금 느꼈거든요. 막상 이것을 깨달으니까 제가 닦아야 할 일이 얼마나 많고, 가야할 길이 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시시각각 천지에서 저에게 던져주는 숙제가 얼마나 많은 것인가를 느꼈거든요.

 

예전에는 형식으로 강조해서 아버지 어머니에게 효도를 해야 되고, 의무적으로 제사를 잘 지내야 되고 그런 식이 강했다면, 지금은 저 자신의 진심을 잘 살펴서 부모님과의 화해, 형제간의 화해 그리고 사랑, 이런 차원에서 즉, 쌓인 앙금이 있으면 풀고 마음을 열어서 실질적인 의미의 효도, 우애를 실천하는 쪽으로 접근을 해요. 그런데 이 과정에 접어드니까 딱 부딪히는 것이 자존심이더라고요. 부부간에도 마찬가지고요. 예전에는 의무적으로 부부간 화합을 했다면, 지금은 실질적으로 부부간 화합을 해야 하는데, 실질적으로 부부간에 화합을 하려고 하면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하고, 또 참아야 되더라고요.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상제님과 수부님이 내어주신 숙제가 이거구나! 이것을 깨달았어요. 이런 일을 한 고비 한 고비 넘어가면서, 수준이 높아진다고 할까요? 제가 낮아지면서 오히려 수준은 높아진다고 느꼈고요.

 

이렇게 신앙을 하다보니까 과거에 제가 신앙을 했던 모습이나, 기존 100년 동안 타성에 떠밀려온 증산신앙의 모습이 보이더라고요. ! 저기서 심법신앙으로 전환해야 하는데. 그런데 심법신앙으로 전환하면 밖에서 보이는 것도 없고 자존심도 내려놔야 하고, 참아야 되는데, 그리고 거창하게 주장하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여요. 기존 100년 동안의 개벽신앙과 의통신앙의 차원에서 보면 그렇게 해서 치천하가 되나? 이런 의심을 할 수 있는데, 가만히 살펴보면 상제님과 수부님은 마음을 바꾸라는 것이고, 몸을 잘 닦아서 가정을 바로 세우고 치천하로 가는 것이 코스로 딱 정해져 있는데, 코스를 이탈하면 아무 소용이 없거든요. 그런 점을 제가 많이 느꼈어요.

 

증산 상제님을 만나지 않더라도, 이 길을 갈 수 밖에 없고, 꼭 이 길을 가야 되겠다 그런 생각입니다. 그 외의 방법은 지금까지 많이 했는데, 전부 실패였고, 상제님도 그것은 방법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리셨다고 보거든요. 그리고 태을에서부터 시작해서 치천하로 가는 심법신앙의 길이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받으려면 우선 저 자신이 변화시키는 길 밖에 없다 이렇게 봅니다. 이상입니다.

 

 

충덕도인 :

 

신앙이라는 것은 인간의 가장 큰 꿈이고 희망이고 미래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신앙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앞날과 미래가 결정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증산신앙에 있어서도 어떻게 신앙할 지, 어디에 중점을 맞춰서 신앙할 지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증산신앙의 올바른 방향을 알아보기 위해 후천개벽이라는 우주적인 사건의 의미와 원인부터 살펴보겠습니다.

후천개벽이 일어나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주의 마음인 태을천상원군이, 구체적으로는 태을천상원군의 생명기운이 후천의 시간을 맞이하여 음양순환에 따라서 양에서 음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개벽의 시운을 따라서 증산상제님께서 선천을 닫고 후천을 여는 천지(개벽)공사를 보셨습니다. 천지공사는 우주의 이치를 상극에서 상생으로 바꾸는 것이고, 구체적으로는 천지도수를 상극도수에서 상생도수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서 인간세계가 상극세상에서 상생세상으로 바뀌고, 더 크게 보면 우주가 상극우주에서 상생우주로 바뀌는 대변혁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이치의 변화 속에서 지구상에서도 자연스럽게 시간대가 변하고 지각이 변하는 물질적인 변화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러한 후천개벽 속에서 살고 있는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주의 환경을 지배하는 진리와 도수가 상생으로 변했기 때문에 후천세상에는 상생인간만이 살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후천에서 살아가려면 인간 자신도 변해야 합니다. 육신을 단련시키고 근육을 강화하는 그런 물질적인 변화가 아니라 내 마음을 변화시켜야 하는데,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태을을 깨달은 상생인간인 태을인간으로 재생신되어야, 즉 마음이 상생으로 개벽이 되어야, 후천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태을인간이 되면 자연스럽게 우주의 진리를 깨닫고 우주와 한마음이 되고, 또한 결론적으로 보면 모든 인간은 도통군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태을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마음 닦고 태을주를 읽어야 합니다. 마음 닦고 태을주를 읽어야 마음을 상생으로 개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태까지 증산신앙의 행태를 살펴보면, 개벽신앙이라는 것은 개벽시점과 지구에 나타나는 물리적인 변화에 집중해서 그것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강구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모으고 돈을 모으고, 어떤 현상이 나타나면 그것이 개벽과 어떻게 연관되는 지를 파악해서 개벽날짜를 예측하고, 모든 것을 희생하며 개벽시점에 집중합니다. 정작 개벽과 급살병에 어떻게 대응할지는 준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개벽신앙입니다. 개벽과 급살병의 원인을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심법신앙이라는 것은 개벽과 급살병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 우주의 중심인 태을천상원군과 증산상제님이 주재하는 천지도수의 변화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러한 변화에 따라 내 마음과 태을에 집중하여 내 마음을 상생으로 개벽하려는 신앙방법입니다. 증산상제님과 같은 상생의 마음을 닦고 태을을 깨달아서 상생세상을 만들려는 것이 심법신앙입니다.

도통신앙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로지 자신의 도통에 집중하는 신앙행태입니다. 도통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이기 때문에 마음을 닦지 않고는 도통을 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지금은 증산상제님께서 도통문을 닫아 놓았기 때문에 도통을 도모하는 것은 헛된 일에 불과합니다. 도통은 마음을 잘 닦고 깨달은 바를 현실 속에서 실천하는, 올바른 신앙인들에게 주어지는 훈장과 같은 것입니다.

일상에서 실행되어 현실화되고 검증된 도라야 덕이 되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됩니다. 일상에서 실천된 진리는 보편화되고 상식화되어 누구나 쉽게 사용하게 됩니다. 일상이라는 것은 우리가 오랜 시간 동안 머물고 진리가 무수히 반복되는 시간과 장소이기에, 일상의 진리는 가장 쉬운 진리이고, 쉽기 때문에 영원히 계속되는 진리가 일상의 진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에서 검증되고 실천되지 않은 진리는 영원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도와 진리는 생활신앙을 통하여 완성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생활신앙을 하면 그 세상이 곧 상생세상이 되는 것이고, 상생세상은 진리적으로 보면 도통세상이 되는 거죠.

물유본말(物有本末)하고 사유종시(事有終始)하나니, 지소선후(知所先後)면 즉근도의(卽近道矣)니라.” 대학경일장 장하의 글귀입니다. 뭐가 근본이고 말단인지, 무엇이 시작이고 끝인지를 알면 도에 가깝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개벽과 도통은 말단이고 끝이 되는 거고, 심법과 생활은 근본이고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근본과 시작을 바로잡으면, 말단과 끝은 자연스럽게 다스려진다는 얘기입니다. 결국 개벽, 도통 신앙을 하면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가 없고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자기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없기 때문에 하늘의 뜻도 성취될 수가 없는 거죠. 그렇지만 심법, 생활 신앙을 하면 증산신앙을 통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고, 더불어서 하늘이 원하는 바를 인간세계에 성사재인할 수가 있습니다.

결국은 심법, 생활 신앙을 해야 나도 성공하고 천지도 성공하고 또한 모든 사람이 성공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과감하게 개벽과 도통 신앙을 벗어나서 심법과 생활 신앙으로 방향 전환을 해야 합니다. 지금은 진법이 새롭게 열리는 운수입니다. 심법과 생활 신앙의 중심에 태을도가 있습니다. 이상 마치겠습니다.

 

 

충양도인 :

 

개벽 도통신앙이란 겉모습에만 치중하여 욕심이 앞서 있는 신앙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수신(修身) 제가(濟家)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마음개벽 마음도통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증산상제님께서는 마음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오직 개벽타령 도통타령만 하는 제자들에게, 개벽이란 것은 때와 기회가 있나니, 마음을 눅혀 어린 짓을 버리라.”고 급한 생각을 달래주시며 마음을 잘 닦아, 오는 좋은 세상을 맞으라. 새 세상을 보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오, 마음을 고치기가 어려운 것이라. 이제부터 마음을 잘 고치라.”고 말씀하시며 엄중히 경계하셨습니다.

 

웅패신앙(雄覇信仰)은 나도 망치고 남도 망치게 됩니다. 오직 마음을 닦아 허상을 버리고 실상을 보아야 합니다. 천지부모님이 원하는 후천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개벽도통신앙을 버리고 생활 심법신앙으로 마음개벽 마음도통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충일도인 :

개벽도통신앙과 심법생활신앙의 차이는 겉모습과 속마음이라 생각합니다. 개벽도통신앙은 상제님의 겉모습과 권능을 추구하는 신앙입니다. 심법생활신앙은 상제님의 참마음, 진리의 태을을 추구하는 신앙입니다. 개벽신앙과 도통신앙으로 사람들을 미혹시켜, 살고 잘 되기 위해 부모도 자식도 멀리하고 몸과 마음 그리고 금전까지도 다 바쳐 신앙하다보니 근본에서 멀어져, 내가 잘되면 그 때 알아줄 것이고 도와주면 된다는 아주 위험한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부모님과 처자식에게 해야 할 도리를 저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상제님의 도는 상생입니다. 부모님과 처자식과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상생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석가모니의 진리가 아무리 좋아도 상제님께서는 석가의 진리로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도를 깨치기 위해 고행의 길을 걸어가며 부모와 처자식의 관계를 온전히 지키지 못하였기에, 그렇게 백 년만 흘러가면 세상의 모든 인류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진리이고 사상이며 도라고 해도, 근본을 볼 수 있어야 하며 근본과 기본에 충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상제님의 진리는 상생의 진리이며 새 세상을 건설하는 진리입니다. 무엇이든 기초가 튼튼해야 하며 기본에 충실해야, 오래가는 것이며 무너지지 않습니다. 상제님의 진리는 부모님과 처자식 간의 인륜을 회복하고 기본 중에 기본인 가정을 잘 다스려야, 더 큰 가정인 직장도 사회도 그리고 나라도 잘 다스릴 수 있으며, 나아가 천하가 한 집안이 되는 후천일가 대시국에서도 진리를 잘 실천하고 접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제님께서는 심법신앙과 생활신앙을 통해서 가정에서의 윤리와 더불어, 낮아지고 겸손해지며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지남식 같은 김형렬의 종에게도 존대를 하셨고, 아버지를 죽인 원수까지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천지부모님은 자식들을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진리의 아버지이자 스승이며 성군이십니다. 그 마음을 온전히 이어받아 그 마음을 배우고 실천하는 자식이, 진리의 도자이자 태을도인이며 후천 대시국을 건설할 대행자가 되는 것입니다.

 

도는 마음을 보고 전해주는 것입니다. 달마가 혜가에게 도를 전해주었을 때, 그 마음을 보고 전해주었습니다. 팔을 잘라 바친 것도 중요하지만, 변치 않을 그 마음을 보고 도를 전해주었습니다. 마음이 같아야 그 진리의 본질이 바뀌지 않고 영원히 전해지는 것입니다. 겉모습만 비슷하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속에는 딴 마음 딴 생각을 품고 있으면, 세상 속에서 혹세무민하는 사술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제님과 고수부님 말씀 중에 마음을 중요시하고 마음을 이야기하신 부분이 참 많이 있으나, 사람들을 기행이적과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개벽에 대해 관심이 더 많았지, 그 기본 근본인 마음과 가정은 시시하다고 신경을 그다지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상제님 성언을 보겠습니다.

 

@ 매양 천지공사를 행하실 때 모든 종도들에게 "마음을 잘 닦아 앞에 오는 좋은 세상을 맞으라." 하시므로, 종도들이 하루바삐 그 세상이 이르기를 바라더니, 하루는 신원일이 청하여 가로대 "선생이 천지를 개벽하여 새 세상을 건설한다 하신 지가 이미 오래이며, 공사를 행하시기도 여러 번이로되, 시대의 현상은 조금도 변함이 없으니 제자의 의혹이 자심하나이다. 선생이시여, 하루바삐 이 세상을 뒤집어서 선경을 건설하사 남의 조소를 받지 않게 하시고, 애타게 기다리던 우리에게 영화를 주옵소서." 하거늘 상제님 일러 가라사대 "인사는 기회가 있고 천리는 도수가 있나니, 그 기회를 지으며 도수를 짜 내는 것이 공사의 규범이라. 이제 그 규범을 버리고 억지로 일을 꾸미면 이는 천하에 재앙을 끼침이요, 억조의 생명을 빼앗음이라. 차마 할 일이 아니니라."

원일이 굳이 청하여 가로대 "지금 천하가 혼란무도하여 선악을 가리기 어려우니, 마땅히 속히 진멸하고 새 운수를 열음이 옳으니이다." 상제님 괴로히 여기사 칠월에 원일과 두어 종도를 데리고 변산 개암사에 가사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서 부안 석교로 향하여 뿌리시니, 문득 그 쪽으로 구름이 모여들며 큰 비가 쏟아지고 개암사 부근은 청명하더라. 상제님 원일을 명하사 속히 집에 갔다오라 하시니, 원일이 명을 받고 집에 돌아간 즉, 그 아우의 집이 비에 무너져서 그 권속이 자기의 집에 모여 있거늘, 원일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곧 돌아와서 상제님께 그 사유를 아뢰니,

상제님 일러 가라사대 "개벽이란 것은 이렇게 쉬운 것이라. 천하를 물로 덮어 모든 것을 멸망케 하고 우리만 살아있으면 무슨 복이 되리오. 대저 제생의세(濟生醫世)는 성인(聖人)의 도요, 재민혁세(災民革世)는 웅패(雄覇)의 술이라. 이제 천하가 웅패에게 괴롭힌지 오랜 지라, 내가 상생의 도로써 만민을 교화하며 세상을 평안케 하려 하노니, 새 세상을 보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오 마음을 고치기가 어려운 것이라. 이제부터 마음을 잘 고치라. 대인을 공부하는 자는 항상 남 살리기를 생각하여야 하나니, 어찌 억조를 멸망케 하고 홀로 잘 되기를 도모함이 옳으리오." 하시니,

원일이 이로부터 두려워하여 무례한 말로 상제님께 괴롭게 한 일을 뉘우치고, 원일의 아우는 그 형이 상제님께 추종하면서 집을 돌보지 아니함을 미워하여 항상 상제님을 욕하더니, 형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고는 상제님께 욕한 죄로 집이 무너짐이나 아닌가 하여 이로부터 마음을 고치니라. (대순전경 pp45-47)

 

@ 또 어느날 가라사대 "나는 풍운조화를 사용하지 않으려 하고, 다만 너희들의 그 마음을 사용하려 하니라." (정영규의 천지개벽경 P332)

 

@ 증산상제님 말씀하시기를 "후천선경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요, 마음 닦기가 급하느니라. 후천을 기다리는 마음이 지극하면 마음 닦기에 신실하고, 후천을 기다리는 마음이 시들하면 마음 닦기에 소홀하느니라." (이중성의 천지개벽경 P221)

고수부님 성언을 보겠습니다.

 

@ 또 어느날 신정공사에서는 말씀이 계시니 이러하니라.

"믿네 믿네 저를 믿네

찾네 찾네 저를 찾네

닦네 닦네 마음 닦네

지심대도술(知心大道術)

심심지문(尋心之門)을 열어 개개히 새사람

재생신 재생신 조화조화 만사지

단주수명(丹朱受命) 우주수명(宇宙壽命)" 하시더라. (선도신정경 p156)

 

개벽과 도통은 때가 되면 자연히 오는 것입니다. 개벽과 도통에 매달려 진짜 중요한 것을 놓치지 마시고, 마음을 잘 닦아 내 중심을 천지부모님의 마음에 중심을 두고, 태을주를 읽어 독기와 살기를 빼고 내 가정과 사회 국가에 진리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개벽과 도통은 결과물입니다. 결과가 있기 위해서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과정에 충실하지도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결과를 바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내 마음을 닦고 태을주를 읽으며 가정에 충실하는 것이 제1의 과정이요, 가정에서 인정받은 다음에 직장 사회 국가에 진리의 사랑을 실천하는 성인이자 대인이 되는 것이 제2의 과정입니다. 그 과정을 충실히 한 사람이 개벽때 의통으로 세상 사람을 살리는 것과 후천 대시국을 건설해 도통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기본에 충실한, 마음 닦는 심법공부가 중요하고 급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상입니다.

 

 

충정도인 :

 

사람이 자라면서 청소년기에 처음 성()에 눈을 뜰 때 성을 잘못 받아들여 너무 자극적인 모습으로 왜곡해 받아들이게 되면, 잘못된 성향으로 흘러 왜곡된 성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성이라는 것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니고 생명이 가진 필수불가결한 자연스러운 것인데도 불구하고 미숙한 마음에 자칫 잘못된 의식을 형성하기도 하는 것처럼, 개벽과 도통이라는 것도 이것을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신비주의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렇게 잘못된 모습으로 흐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개벽과 도통이라는 것은 증산신앙이 다른 선천종교들과 구분되어지는 핵심적인 개념인 것이 사실입니다. 개벽과 도통이 없다면 기존 불교나 기독교같이 오랜 세월 다수에 의해서 검증되고 부작용이 최소화된 형태인 기존 종교에 대비해, 있어야 할 의미가 퇴색될 것입니다. 다만 그 과정적인 부분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고 개벽과 도통이라는 결론이 한순간 홍시 떨어지듯 주어지리라는 미숙한 생각들 때문에, 현실적으로 많은 부작용과 부조리를 낳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개벽과 도통을 바라는 미숙한 마음은, 의존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인식과 처신을 불러 일으킵니다.

 

개벽과 도통신앙은 때를 기다리고 누군가의 권능으로 이루어지길 바라기에, 외부에 의존하는 조급한 마음을 가지게 합니다.

 

개벽과 도통신앙은 한순간 모든 것이 바뀌고 해결되리라는 생각을 가지게 해, 현실에 등을 돌리는 반사회적인 모습으로 흐릅니다.

 

개벽과 도통신앙은 외부로부터의 요행을 바라기에, 스스로 공부하고 경험하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깨쳐 업그레이드되어 가는 과정을 가지지 못합니다.

 

개벽과 도통신앙은 남을 보고 밖을 보는 신앙에 그칠 뿐, 자신의 내부에서 찾는 깨침의 과정이 되지 못합니다.

 

결국 미숙한 마음은 개벽과 도통을 자극적으로 받아들여 왜곡된 인식으로 인생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가지만, 성숙된 마음은 개벽과 도통이 의미하는 본질이 마음과 현실의 생활임을 각성해 실질적으로 주체적으로 개벽과 도통을 준비해가는 충실한 삶의 과정을 살아가게 합니다.

 

 

충익도인 :

 

나쁜 목적에 좋은 수단이 있을 수는 없지만, 좋은 목적에 나쁜 수단은 있을 수 있습니다. 목적과 목표 달성에는 수단과 방법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 과정을 어떻게 실천해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내가 인식하고 바라보는 목적에 어떤 의미를 두는 가, 어떤 관점으로 받아들여지는 가에 방점이 있다 하겠습니다. 상극지로에 금수대도술이 펼쳐져온 선천세상에서는 목적에 정당성을 부여하다 보니, 수단과 방법이라는 과정이야 어찌됐든 그것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도 있듯이, 자기 욕망에 부합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리(事理)에 맞는 정당성이 배제된 수단과 방법의 과정들을, 목적이라는 명분아래 용인하고 묵인해 왔던 게 지금까지의 현실입니다.

 

'지소선후면 즉근도의라 했습니다. ‘일에 있어서 선후를 알면 도에 가깝다는 말인데요. 증산신앙의 목적을 심법 즉 마음 닦음에 두지 않고 개벽과 도통이라는 본말이 전도된 신앙행태는, 구도의 정석이라 할 수 있는 심법의 생활신앙을 멀리함으로써 신앙은 하지만 도를 비껴남으로, 그 신앙이 깊으면 깊어질수록 마치 숙성이 잘못된 젓갈 비린내의 고약한 냄새처럼 본인은 물론이고 주위에 해악을 끼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증산신앙의 우선은 마음을 닦는 데 있고, 그 심법의 바탕위에서 생활신앙을 실천해나가는 것이 증산신앙인의 참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벽 도통신앙과 심법 생활신앙의 차이는 증산신앙의 목적을 어느 관점에서 인식하고 받아들이냐 문제라 할 수 있는데, 과정을 무시한 목적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개벽과 도통은 때가 되면 열리는 것이고 마음이 잘 닦여있으면 내려지는 것이라, 일의 선후를 알면 도에 가깝다는 말씀처럼 증산신앙의 우선은 마음 잘 닦아 생활신앙을 일상에서 실천해나감으로써 참도인의 모습인 후천인생으로 거듭나야 되겠습니다.

 

 

종부님:

 

태을도 신앙을 하면서, 개벽도통 신앙과 심법생활 신앙에 대해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다시한번 정리하는 측면에서 저 역시 그 차이를 얘기해보겠습니다.

 

개벽도통 신앙이나 심법생활 신앙이나, 개벽이라고 하는 객관적인 환경변화를 인정하는 것은 차이가 없지요. 그런데 개벽 도통신앙 쪽에서는 개벽이라는 현상을 지나치게 중시하다보니까, 그 속의 행동주체인 인간에 착안하지 않고 외적인 기상이변이라든가 특이한 돌발적인 재해라든가 사회에서 특기할 만한 사건이라든가 이런 쪽으로 자꾸 관심을 돌리게 되고, 그런 일련의 현상들을 통해서 개벽에 더욱 집착하게 되는 거지요. 그러면서 개벽을 중시하는 데서는 개벽시점에 좀더 천착하게 되고, 도통신앙에서는 도통에 의미를 두다보니 신통묘술쪽으로 관심을 가지고 좀더 신통하다는 소문이 들리면 계속 옮겨다니게 됩니다. 하지만 도통신앙은 수행의 목적이 올바르지 않기 때문에 허령이 들릴 가능성이 높지요. 상제님께서 주문수행을 할 때 바른 자세를 말씀하시면서, 허령이 들리는 경우를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고 척이 많고 주문읽는 법이 잘못되어 그렇다고 말씀하시거든요. 수행을 하려면 우선 깨끗한 마음, 정심(正心)을 가지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정심이라면 사사로운 마음, 욕심이 없는 마음이라 할 수 있는데, 도통신앙은 사람 마음은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도통이라는 사사로운 목적을 먼저 두고서 시작하기 때문에 출발부터 잘못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개벽신앙이든 도통신앙이든 모두 외양을 중시하기 때문에, 교세(敎勢)나 건물의 규모라든지 포교포덕을 얼마나 많이 했고 성금을 얼마나 많이 냈는지 이런 쪽으로 대부분 개인의 신심을 가늠하거나 신앙단체의 진법 여부의 기준으로 잡기 때문에, 신앙을 하는 주체가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현실에 충실하게 되기는 어렵다. 그래서 결국 현실에 착근하지 못하고 가족관계도 원만하지 못하게 되는 그런 부작용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개벽이라는 것은 하늘 땅 우주가 모두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그 속에 깃들어있는 생명체들도 당연히 그 환경에 맞게 바뀌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힘들어지지요. 어찌 보면 다른 생명체들은 생존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에, 동물이든 식물이든 상극 상생의 잣대를 들이대는 게 무의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마음, 즉 자유의지를 가졌기 때문에, 생존을 넘어서서 마음을 선한 쪽으로 쓸 것이냐 악한 쪽으로 쓸 것이냐, 사익을 위해 쓸 것이냐 공익을 위해 쓸 것이냐, 본인이 선택을 할 수 있지요. 그래서 개벽을 통해서 인간은 몸도 개벽기운에 맞춰서 바뀌어야 하지만, 마음자체도 상생지리에 맞게 바뀌지 않으면 존재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우리가 보통 남을 살린다고 얘기하는데, 자기부터 바뀌지 않으면 자기조차 살 수가 없는 거지요. 그래서 내가 먼저 바뀌어야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게 가능하다. 자기를 바꾸지 못하면 개벽이라는 현상, 그 기운에 나를 적응시킬 수 없기 때문에 당연히 영원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면 영원한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상제님 말씀에 의하면 거짓을 하지 말고 마음을 바르게 해야 된다, 진실해야 된다고 하십니다. 강증산과 태을도 289쪽에 있는 세 번째 성구에서 세 번째 줄부터 보겠습니다.

 

@ 이제 모든 일을 풀어놓아 각기 자유행동에 맡기어 먼저 난법을 지은 뒤에 진법을 내이리니, 오직 모든 일에 마음을 바르게 하라. 거짓은 모든 죄의 근본이요, 진실은 만복의 근원이라. 이제 신명(神明)으로 하여금 사람에게 임감하여 마음에 먹줄을 잡혀 사정(邪正)을 감정하여 번개불에 달리리니, 마음을 바르게 못하고 거짓을 행하는 자는 기운이 돌 때에, 쓸개가 터지고 뼈마디가 튀어나리라. 운수는 좋건만은 목 넘기기가 어려우리라. (대순전경 p306)

 

먼저 난법을 지은 뒤에 진법을 낸다. 오직 모든 일에 마음을 바르게 하라.’ 오직 마음을 바르게 해야지만 진법을 만날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상제님 말씀에서도 먼저 난법을 지은 뒤에 진법을 낸다고 하셨듯이, 우리가 개벽 도통신앙을 거치지 않고 바로 심법 생활신앙에 도달하기는 어렵습니다. 과정상 우리는 난법을 먼저 만날 수밖에 없는데, 난법을 만난 이후에 내가 모든 일에 마음을 바르게 하며 근본을 찾겠다는 진리에의 열정, 구도심을 멈추지 않는다면 진법을 만날 인연이 당연히 보장되어 있겠지요. 그러면서 거짓은 모든 죄의 근본이요, 진실은 만복의 근원이라.’ ‘마음을 바르게 못하고 거짓을 행하는 자는, 기운이 돌 때에 쓸개가 터지고 뼈마디가 튀어나리라. 운수는 좋건만은 목 넘기기가 어려우리라.’ 그러니까 개벽이라고 하는 큰 운수는 너무나 좋은 운수인데, 내가 마음을 바르게 하지 못하고 거짓을 행하게 되면 그 운수가 돌아닿을 때 그 목을 넘어갈 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개벽 도통신앙에서 당연히 심법 생활신앙으로 전환해야 되는 거지요. 그것은 너무도 자명한 이치입니다.

 

심법생활신앙은 말 그대로 마음을 닦고 일상에 충실한 건데요. 개벽으로 오는 시대는 인존(人尊)시대이기 때문에 당연히 인간이 주인이 되는 시대이고, 그래서 인간이 스스로 내면을 변화시키고 인간관계를 상생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대학경에 격물치지 성의정심 수신제가 치국평천하구절이 나오지요. 자신의 마음 닦기와 태을주 수행을 통해서 본래의 태을신성을 회복해서 내 중심을 세워 열풍뇌우불미하는 데까지 가야지만, 수신제가로 치국평천하할 수 있게 되는 거지요. 심법생활신앙은 깨침과 실천을 전제로 하므로, 신앙과정에서 깨친 바를 얼마만큼 실천하느냐를 가지고 자신의 신앙정도를 스스로 판단하는 자기점검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마음 닦기와 태을주 수행을 통해서 그 본래의 태을신성을 회복하는 것이 상제님이 말씀하신 남모르는 공부이자 또한 의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개벽도통신앙은 선천의 대부분의 신앙이 가진 기복신앙의 한계를 벗어나기가 어렵기에, 결국은 심법생활신앙으로 가야지만 개벽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후천 진리세상의 영성을 우리가 미리 우리 몸속에 쌓아올려서 후천인간화를 이룰 수 있는 건데, 그러려면 한마디로 상제님이 말씀하신 일심(一心)’을 가져야 합니다. 그 일심을 최수운선생은 성경신삼 자로 풀어냈는데, 선천의 신앙들은 성과 경과 신이 동시에 균형을 잡아 모두를 이루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의 경우, 모든 일에 정성을 들이게 되면 스스로 마음이 정돈되지 않을 수가 없고, 스스로 마음이 정돈되면 자연스럽게 바른 길로 바른 마음으로 내 마음이 바뀌어가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이 들고요, 예전에 종장님이 경()을 말씀해주시면서 저도 태을을 생활 속에서 어떻게 구현해가는가 구체적인 방법론에서 커다란 가르침을 받았는데, 경을 통해서 나를 낮춤으로써 타인을 배려 존중하게 되면 그 속에서 맹목적인 신앙이 나오기 어렵습니다. ()의 경우, 신앙이라는 것이 믿음()으로 시작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선천에서는 사실 너무 신에만 치우쳐있어서 신앙의 폐단이 생기는 거라 생각이 들거든요.

 

정성(精誠)을 들이게 되면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치가 잡히지 않을 수 없고, 또 경()을 하게 되면 하심(下心)이 생겨서 경하는 사람이 교만해지거나 정도(正道)를 벗어나지 않게 되는데, 성과 경이 없이 신()에만 매달리게 되면 맹목적인 신앙으로 빠지기가 굉장히 쉬워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한번 말씀드리자면, 상제님이 말씀하신 일심을 통해서 성공할 수 있고 그 일심은 성경신 삼 자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나의 일심의 정도를 돌아봐야겠지요. 결국은 종장님이 말씀하신, 깨친 바 얼마나 실천을 해내느냐로 내가 얼마만큼 일심이 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정유년 초, 인천법소에서 정유년 각오를 얘기했더랬어요. 그때 저는 제가 잘하지를 못해서 그때까지 안하고 있던 인터넷을 통한 홍보활동을 해보려한다 했는데 그 부분이 아직도 미흡해서, 아까 종장님이 도산 안창호선생의 무실역행을 말씀하시는데 제 마음이 계속 뜨끔거리더라고요. 우리가 심법생활신앙을 해야 한다는 것은 모두가 당연히 이해하고 이의가 없는데, 문제는 그것을 우리가 생활 속에서 얼마만큼 실천을 해내느냐 그것이 우리에게 앞으로 주어진 과제라고 생각이 됩니다. 오늘 다시한번 반성하면서, 앞으로 좀더 신경써서 저의 다짐을 실천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종장님 :

 

좋은 말씀들을 잘 들었습니다. 상제님 고수부님이 천지공사보시고 신정공사 보신 그 목적과 목표가 어디 있느냐, 그것은 천지부모님의 마음과 마음씀을 배워서, 다시 말하면 천지부모님의 도덕을 체화해서 천지의 화육에 동참하라는 것입니다. 현무경에서도 보면, 결국은 하늘의 운수를 받고 땅의 운수를 받고 신명을 조화해서 인간한테 길을 터주었는데, 그 길이 무엇이냐? 천지화육에 참여하라는 거예요. 무엇을 가지고 하느냐 하면, 천지부모님이 밝혀주신 도덕을 가지고,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천지부모님의 마음과 마음씀을 배워가지고 그걸 실천해서 천지화육에 동참하라는 거예요.

 

상제님께서는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실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말씀해주셨는데, 세상에 학교를 널리 세워서 천하를 다 계명(啓明)하게 하고 문명하게 하려고 했는데, 현하의 문명 자체가 사리에 빠지고 이끗에 빠져 인간의 폭력과 인간의 흉폭화를 만들어서, 인간을 교만하고 거만하고 자만하게 만들었다는 거예요.

 

후천개벽시대라는 것은, 다른 말로 말하면 자기의 참모습을 찾는 거고 자기의 진면목을 찾는 거거든요. 자기의 참모습과 진면목을 찾으려면 참모습과 진면목을 찾을 수 있는 도를 만나야 해요. 도를 만나서 그 도를 현실적으로 이화할 수 있는 덕을 갖추어야 한다는 거예요. 도를 만났어도 내가 덕을 갖추지 못한다면 제대로 활용을 하지 못한다고요. 아무리 좋은 곡식종자도 기름진 밭에 뿌리고 잡초를 잘 제거해주어야 무럭무럭 자라지, 자갈밭이나 바위가 많은 데나 또 풀이 무성한 곳에다 뿌리면 곡식이 움도 못 튼다는 거예요.

 

아까 제가 서두에 사실, 진실, 성실, 충실, 결실, 이 다섯 가지 실()을 얘기했습니다. 오실(五實)을 얘기한 것은, 천지부모님의 유업을 받들어서 천명을 완수하려면 우리에게 오실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에요. 천지부모님과 이심전심된 실천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할 수 있는 실천의 표준이 되는 윤리, 이것을 상제님 고수부님이 모범을 보여서 아주 자세히 얘기하셨어요. 우리가 마음을 열고 마음을 닦아 천지부모님과 이심전심되어서, 천지부모님의 마음과 뜻과 생각에 맞는 가정생활 사회생활을 사실적으로 진실하게 성실하게 충실하게 실천하면, 길화개길실의 결실이 된다는 거예요. 천지부모님의 마음과 뜻에 맞게 가정과 직장에서 우리가 정확한 사실에 바탕해서 실천하느냐, 그 실천이 진실하냐, 그 실천을 성실하게 하느냐, 그 실천을 충실하게 하느냐, 거기에 따라서 좋은 결실이 있을 수 있고 나쁜 결실이 있을 수 있다는 거예요.

 

이제까지 태을도인들이 돌아가면서 개벽신앙 도통신앙과 심법신앙 생활신앙의 차이에 대해서 쭉 얘기했는데, 여러분들이 얘기하신 것처럼 한 번에 상제님 고수부님과 이심전심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도통신앙과 개벽신앙을 하루아침에 심법신앙 생활신앙으로 바꾸어나갈 수는 없어요. 우리가 마음이 깊어지고 깊어지고, 넓어지고 넓어지면, 천지부모님이 원하시고 생각하시는 마음과 뜻과 생각에 점차 일치시켜갈 수가 있다고요. 그래서 우리가 가정과 직장에서 실천함에 있어서, 상제님 고수부님의 마음과 뜻에 사실적으로 맞게 또 진실하게 성실하게 충실하게 열심히 해서 길화개길실하는 결실을 맺도록 해야겠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8월 월례치성 도훈을 모두 마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출처 : 태을도(太乙道) 대시국(大時國)
글쓴이 : 마중물(忠日)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