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을도 2017년 6월 월례치성 도훈
태을도인에게 믿음이란
2017. 6. 24(음력 윤 5. 1)
월례치성을 맞았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함께 한다고 하는 것은 나의 존재, 나의 온전한 목적, 나의 온전한 실체를 현실 속에 자취로 남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생각으로도 얼마든지 만날 수 있고 또 관념적으로도 얼마든지 연결되어 일을 함께 한다고 하지만, 결국은 시간을 함께 하고 공간속에 같이 있어야지만 명실상부한 성사재인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태을도인들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시간을 내서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치성을 모시고 도담을 나누고 하는 것은, 진리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굉장히 의미가 있고, 일반 세속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하나의 큰 발걸음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사학자인 카(E. H. Carr)는“역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의 대화다.”라고 얘기했는데, 그럼 누가 주체가 되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의 대화를 하느냐? 그것은 인간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대화하는 주체가 되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대화를 하는데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떤 사람과 대화를 할 거냐? 역사와의 대화를 하려면 첫째는 내가 역사에 대해서 믿어야 된다고요. 시간과 공간을 같이 했던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기록, 그분들의 숨결, 그분들의 혼신을 다한 정열, 용기, 지혜, 그런 걸 믿지 않으면 대화를 할 수가 없거든요. 결국은 역사를 일구어갔던 사람들에 대해 내가 믿음을 가지고 대화했을 때, 역사가 살아있는 역사가 되고 움직이는 역사가 되고 새로운 큰 세상을 열어가는 하나의 안내판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역사의 큰 족적을 남긴 사람일수록 역사에 대한 믿음이 있고, 또 역사를 일구어왔던 사람에 대한 믿음이 있어요. 믿음이 없으면 대화의 의미도 없고, 대화를 해봐야 별 성과도 없다고요. 믿을 신(信)이라고 하는 것은 한문으로 보았을 때 사람의 말인데, 역사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람이 말로써 만들어가는 것이거든요.
그럼 우리가 천지부모님을 모시고 이 상극세상을 상생세상으로 만들어가는데, 말 중에 어떤 말이 최고의 믿음이 있는 말이냐? 그것은 ‘태을(太乙)’이에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말 중에서 가장 믿음을 대표하는 말이 뭐냐. 그것은 ‘태을’이라는 말이에요. 성경의 창세기에도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태을이라는 말을 통해 세상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 그 세상사람들이 태을이라는 믿음의 말을 통해서 태을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을 창조하고 생명을 이어가고 생명을 전해주는 가장 근본적인 기틀이라는 것이죠.
태을도인에게 믿음이란 무엇인가? 태을이라고 하는 믿음의 결정체, 믿음의 진액, 이것을 내 믿음으로 받아내려서 세상사람들한테 태을과 믿음관계를 형성해서 태을의 믿음사회를 만들어가는 거거든요. 태을일맥으로 태을 세상을 만든다, 그것은 결국 태을을 바탕으로 해서 믿음세상을 만든다는 거거든요. 가장 확실한 믿음관계는 태을관계라는 거죠. 가장 확실한 생명관계는 태을관계라는 거예요. 내 마음 속에서 태을에 대한 믿음을 확고하게 뿌리내려서 태을을 명실상부한 내 말로 받아들이면, 태을에 대한 믿음이, 생명의 씨가 내 마음속에 자라서, 그것이 다른 사람한테 또 다른 태을의 믿음씨를 전할 수가 있다는 것이죠. 우리가 태을을 가지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대화를 할 수 있는 주체가 되어서, 과거 현재 미래를 시간적으로도 주재하고 공간적으로도 주재해서, 명실상부한 태을 세상을 만들어나가야겠다. 그것이 진정한 성사재인이라는 것이죠. 오늘 우리 태을도인들께서 ‘태을도인에게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한 것이 있으면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하도록 하겠습니다.
충익도인 :
그렇잖아도 종장님이 월초에 태을도인에게 믿음이란 말씀을 하셔서, ‘태을도인에게 믿음이란’ 주제를 가지고 제가 한 달 동안 화두를 틀었어요. 막연한 믿음이 아니고 ‘태을도인에게 믿음이란’ 이라고 규정을 하셨기 때문에, 태을도는 현실적이잖아요. 실질적으로 앞으로 우리 후대에 될지 내일 당장 올지 모르겠지만 의통을 집행해야 되는 부분도 있고, 현실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에, 막연하게 기존종교처럼 관념적인 믿음은 아니라는 것이죠. 제 현재 신앙상태에서 봤을 때 믿음이란 게 무엇인가를 여러 가지로 생각해 봤을 때 정확하게 정의를 못 내리겠더라구요. 그래서 글로 정리가 되는 대로 카페에 올릴까 생각하고 있는데 종장님이 말씀하시라고 하시니까...
제가 드라마를 자주 보는 편은 아닌데, 전에 드라마를 우연히 본 적이 있습니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청춘 남녀가 데이트를 하더라고요. 데이트를 하는 중에 남자가 상대 여자한테 “좋아한다.”하고 자기 마음을 드러내니까, 상대 여자가 물어보는 거예요. “내가 어디가 좋냐. 어디가 좋아서 나를 좋아하냐.” 그러니까 남자가 그렇게 얘기하더라고요. “그런 바보같은 질문이 어디 있냐. 좋으면 좋은 거지.”
믿음이란 것도 그런 거 같아요. 제가 보기는 물론 태을도신앙을 하면서 마음속 밑바닥에는 개벽이나 의통, 이런 여러 가지 주어진 현실적인 것이 있지만, 그게 자칫 잘못하면 기복적으로 흐를 수 있어서 그걸 뛰어넘는 믿음을 가져야 된다는 거지요. 자칫 현실 속에서 기복적인 믿음을 가지면 믿음이 지치잖아요. 실제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신앙에 회의를 느낄 수도 있는 것이고, 어떤 외부적 충격이 있으면 마음이 흔들릴 수 있는 것이고, 태을도도 마찬가지이고 저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실제로 증산신앙인들이 신앙하다가 비껴나는 게, 믿음에 대해 막연히 관념적이고 기복적인 것들이 바탕에 깔려있어서 그렇지 않냐는 거지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믿음에는 조건이 없다. 그냥 좋으면 좋은 거다. 단순하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이 정도 말씀을 드립니다.
충정도인:
요즘 모 사이트에 글을 올리다가 욕을 먹고 있는데, 태을도 홍보를 하니까 이렇게 공격들을 하시더라고요. 욕을 먹을 만한 그런 걸 한 건 아닌데 욕을 먹으니까, 왜 그럴까 가만히 생각을 해보게 되더라고요. 지금 믿음에 대해 말씀을 하시니까 그게 떠오르더라고요. 결국 그 사람들이 사람에 대한 믿음, 사람의 본성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이죠. 다른 사람을 못 믿지만 제가 볼 때는 그 이전에 자기의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모르는 거지요. 그렇게 상처를 받았기에 타인에 대한 믿음도 없고, 또 자신도 그런 마음이 있기에 인간이라는 것이 못 믿을 존재다, 나를 포함해서. 그렇게 가게 되는 것이지요.
결국 믿음이라는 것은 내 자신의 본성이 무엇인가, 이것을 확인해야 남의 진면목도 바로 보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태을이라는 것, 이치와 물질의 바탕이요 본체자리인 태을, 그 태을의 성정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결국 내 본성이죠 사실은. 내 본성이 무엇인가? 나도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화를 터트리기도 하고 하는데, 이런 것들이 원래 있는 것들인가 아니면 원래의 것에서 잘못 뻗어나와 작용을 하는 것들인가?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인가? 그런 것들을 분별을 하고 나의 본성을 살펴서 그 마음을 발현을 하면 해결이 되어가는 것인데, 그런 믿음의 길이라는 것이 우리가 말단의 복잡한 현실 속에서 머리로 생각하면 복잡하기만 한데, 성인들께서도 말씀을 하시지만 그런 것을 벗어나 그 본성자리를 확인을 해야 벗어날 수가 있고, 나한테 대한 신뢰가 싹터야 남에 대한 믿음도 가능하다 하는 것이, 공부하고 수행하면서 느끼는 점입니다.
종장님 :
내가 나를 믿는 것이 진짜인가? 지금 현재의 내가 나를 믿는 모습이 진짜인가? 제가 서두에,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대화라고 말했는데, 이제까지 내가 믿었던 믿음하고 지금 믿는 믿음하고 앞으로의 믿음이 같은가 다른가? 믿음의 일관성이 있나? 믿음의 최고의 근거는 태을인데, 믿음이 제대로 자리잡으려면 이해가 되어야 해요. 알아야 되잖아요. 내가 나에 대해서 알아야 되고, 태을에 대해서 알아야 되고. 상제님께서 대학경 일장장하를 잘 알아두라고 하셨는데, 결국 격물(格物)이에요. 아는 것, 이해하는 것, 깨치는 것. 그걸 바탕으로 해서 믿어야지 맹신이 안 되고 미신이 안 되는 것이지,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알려면 제대로 알아야지 섣불리 알면, 엉뚱하게 믿음을 오도시킬 수 있거든요.
충일도인 :
태을도인에게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믿음이란 곧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고수부님께서 고찬홍 성도에게 “너는 누구를 믿느냐?” 물어보셨을 때 “자기 자신을 믿는다.” 대답했고, 고수부님께서 고찬홍 성도를 담뱃대로 때리시며 다시 “너는 누구를 믿느냐.”고 세 번을 물어보셨습니다. 그 때마다 고찬홍 성도는 “제 자신을 믿습니다.” 대답했습니다. 고수부님께서 “그 다음으로 누구를 믿느냐.” 물으시니, “상제님을 믿습니다.” 대답했습니다. 고수부님께서 “그래, 맞다. 제 자신도 못 믿는 놈이 누구를 믿겠느냐.” 하셨습니다. 내 자신을 믿고 난 뒤에 상제님을 믿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믿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오면서 경험과 책을 통해, 스승을 통해, 배웠던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상제님 말씀 중에 “파라 파라 깊이 파라. 얕이 파면 다 죽는다.” 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온전한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내가 치열하게 공부를 해야 하며, 그 치열한 공부 속에서 깨달아 저는 지금 태을도에 와있다고 생각을 하고, 상제님의 진리의 종착역인 태을을 찾아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상제님의 진법을 찾기 위해서 진리 공부를 치열하게 하였고 OOOOO과 OOO를 거쳐 태을도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태을도에 오면서 태을의 진리가 참 진리라는 확신과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내 자신이 선택한 길입니다. 저는 저 자신을 믿기에 그 믿음을 가지고 태을도를 선택하였고, 또한 치열하게 태을을 공부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제님께서 태을도 종장님에게 내려주신 “너의 마음이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이 너의 마음이니, 이 마음을 널리 전하라.”고 하신 천명 또한 믿으며 마음을 배우고 태을을 깨쳐나가는 중입니다.
상제님께서는 일심으로 가는 길을 성, 경, 신으로 표현해 주셨습니다. 성실해야 하며 공경해야 하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일심으로 가는 길 중에 믿음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 자신을 믿기에 그 진리의 믿음위에 도심주를 세워 마음을 바로 잡아가는 것이 믿음의 종착점이라 생각합니다. 내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도 변하지도 흔들리지도 않는 진리의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라 생각합니다.
태을도인의 믿음은, 독기 살기를 빼고 천지부모님의 마음을 배우고 태을을 깨쳐 나도 살고 남도 살려 새로운 후천 대시국을 건설한다는, 철저한 믿음과 확신이 있기에 지금도 태을도인의 길을 가고 있으며, 그 믿음으로 오늘도 이렇게 인천법소에 다같이 모여 마음을 같이하며 태을을 노래하고 도담을 나누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상입니다.
충덕도인 :
육신을 가진 생명은 육신의 한계 때문에 여러 가지로 제약을 받고 있지요. 생명을 유지시키는, 생명의 근원이 되는 세상은 보이지 않는 세계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마음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보통 사람들도 각자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 일상생활의 믿음이든 간에, 그 믿음대로 미래의 결과물을 얻어서 생명을 유지하고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믿음은 내가 깨닫지 못했고, 내가 경험하지 못했고, 내가 검증하지 못한,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내가 경험한 것처럼 내가 깨달은 것처럼 생각하고 따르는 것이 믿음이 아니냐 생각합니다.
믿음에 따라 그에 합당한 각기 다른 결과를 얻기 때문에,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믿음은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요하단 생각이 듭니다. 믿게 되면 그 믿음에 의해서 마음의 방향이 결정되고, 마음의 방향이 결정되면 그 마음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추진력이 생깁니다. 그 마음의 방향과 추진력의 결과가 각 개인의 생사를 결정하고 각 개인의 영화와 복록을 결정하기 때문에, 결국 믿음은 우리의 미래의 모습이고 꿈이고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태을도인에게 믿음이란 무엇이냐? 그것은 첫째는 상제님 고수부님을 믿는 것이고, 상제님 고수부님을 믿어서 나의 실상이 뭔지, 상제님의 가르침과 말씀을 통해서 내 자신이 뭔지를 알아서 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내 생명의 본질이 무엇이고 또 이 우주 간에서 나란 존재는 어떤 위치에 있는 거냐, 그것을 믿는 것이고. 또 나를 믿는 것은 곧 태을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내 생명의 근원은 태을이기 때문이죠. 나를 믿는 것은 태을을 믿는 것이고, 역으로 태을을 믿지 못하면 결국은 나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태을도인에게 믿음이란. 나를 믿고 태을을 믿어서 태을의 진리를 현실화시켜서, 무궁한 행복과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참된 인간, 인간다운 인간인 태을인간으로 완성되는 것이 태을도인의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충양도인 :
어떠한 종교이든 모두 믿음을 전제로 신앙을 합니다. 믿음이 없는 종교는 존립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증산신앙인들 역시 상제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나름대로 수도생활에 전념합니다. 태을도인에게 믿음이란, 무조건 대두목에게 충성만 하면 도통 받는다는 믿음이 아닌, 상제님 고수부님께서 항상 강조하신 "선천으로부터 지금까지는 금수대도술(禽獸大道術)이요, 지금으로부터 후천은 지심대도술(知心大道術)이니라. 마음 닦는 공부이니 심통공부(心通工夫)어서 하소. 제가 저의 심통도 못하고서 무엇을 한다는가." 하는 구절입니다.
증산상제님과 고수부님께서는 오직 마음만을 본다고 하셨습니다. 첫째도 둘째도 마음 닦고 태을주 읽기입니다. 천지부모님과 이심전심(以心傳心)되어 천주의 품성을 되찾아야 하고, 마음속의 시천(侍天)과 태을(太乙)을 밝혀 후천인간인 태을도인으로 거듭나는 게 진정한 믿음이라 하겠습니다.
충희도인 :
저는 어릴 때부터 정신현상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맛있는 과일을 먹으면 코와 혀를 통해서 향기와 향긋한 과일 맛을 느낄 수 있는데, 그 독특한 체험은 물리적이기도 하고 또 화학적인 것인 동시에 정신적인 것이었습니다. 내 몸은 우주와 연결되는 통로이고 내 정신은 우주의 운동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서 그려지는 마당이라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정신은 몸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오감을 인식하는 것 말고도 수학적인 계산을 하기도 하고 추리를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감정이 일어나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장 독특한 정신현상은 꿈이었습니다. 수면으로 빠져들어가는 과정도 신비롭거니와 수면 중에 꿈을 통해서 펼쳐지는 정신현상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어릴 때부터 궁금한 사항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학교 다닐 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관련 책도 많이 봤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꿈이 미래를 예측하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꿈보다 더한 것이 신앙을 통한 정신현상이었습니다. 신앙은 한자를 풀어보면 믿고 우러른다는 뜻인데, 가장 기본적인 정신작용은 믿는다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도 사실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쉽지 않은 정신작용입니다. 믿는 것이 쌓여서 가치관을 형성하고, 가치관에 따라 판단의 종합이 서고, 그 결과에 따라서 인생이 펼쳐집니다. 그런데 신앙에서 믿음은 검증이 불가능한 것에 대한 것임에도 절대적인 신뢰, 인생을 거는 모험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보짓이라고 판단하고 격하하면 무신론자가 되고, 그럴 수도 있겠다고 판단하면 유신론자가 됩니다.
태을도에 입도하기 전, 제 스스로에게 물어봤어요. 강증산은 진짜인가? 고수부는 진짜인가? 그리고 인간으로 강림한 단주는 진짜인가? 나는 왜 이 분들에게 관심이 계속 가는가? 내가 태을도 신앙을 해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왜 나는 태을도를 믿는가? 이런 생각을 많이 해봤어요.
태을도를 믿는다는 것은 태을을 깨쳐서 선천에서 후천으로 이사를 가는 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후천으로 가려면 태을을 깨쳐야 돼요. 이사하려면 어디로 이사를 가는지 주소를 정확하게 알아야 하잖아요. 그리고 이사 가는 집에 이사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확보해야 하고, 또 실질적으로는 점유를 이전받고, 쉽게 말해 집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가져야 하잖아요. 주소가 후천이라면, 그 집으로 가는 길은 태을도이고, 그 집을 여는 열쇠가 태을입니다. 아무리 후천에 가고 싶어도 태을을 쥐지 못하면 후천의 문이 열리지 않고, 그 열쇠를 받으려면 태을도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행하는 것이고 증명하는 것입니다. 수고스러워도 참고 가는 겁니다. 그것이 더 좋아서요. 인간이 가는 최고의 길이 태을도의 길입니다.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저에게 일생의 화두입니다. ‘태을도인에게 믿음이란’이라는 주제로 두서없이 말씀드렸습니다.
종부님 :
믿음이라는 것은 믿음의 주체가 있고 믿음의 대상이 있게 되는데, 그러니까 믿음이란 결국은 믿음의 주체인 나로부터 시작되어서 외부로 향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정말 자기 자신에 대하여 존재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인식주체로서 이 세상의 중심인 나에 대한 긍정 그 믿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외부로 향한 믿음이 나갈 수 없다고 생각이 들고요.
믿음에는 관계 사이의 믿음도 있지만, 그 믿음의 방향이 종교적으로 가고 가고 또 가다보면 결국 근원으로 향하게 되어 있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존재의 최정점에 있는 것이 하느님이기 때문에, 종교마다 어떤 식으로 부르든 간에 그 종교에서 하느님이라고 생각하는 그 대상에 믿음이 이르게 되지요.
그런데 그 믿음이 하느님을 넘어서서, 우리가 정말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해왔던 근원자리까지 도달할 수 있으면, 그 믿음은 완성될 가능성을 이미 갖고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믿고 근원을 향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결국은 이런 시절인연을 만나서 태을도를 통해 ‘태을’을 깨쳐서 태을도인이라는 이름으로 형상화되는 게 아닌가 생각하는데요.
그러면 믿음의 조건들이 있겠죠. 그 믿음은 일단 믿는 그 대상에 대한 신뢰가 전제되어야 하겠다. 그 다음에 일관되게 변하지 말아야겠다. 그러니까 믿음이 흔들린다고 하면 그 믿음은 진정한 올바른 또한 전제가 제대로 되어 있는 믿음이라 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상제님께서 고수부님께 죽어도 변개함이 없겠느냐 그렇게 다짐받으셨고, 또 종도들에게도 믿는데 꼽았던 손가락이 펴지면 죽음을 변치 못한다 하셨지요. 또 상제님께서 돌아가실 무렵에 자현에게 "나를 믿느냐." 자현의 대답이 "믿지 않았으면 고부화란 때 배신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맞다." 하시며 '죽어도 나를 믿겠느냐'고, '믿는다'는 대답을 받아내시죠. 상제님도 고수부님과 종도들에게 그런 강력한 믿음을 원하셨다는 거예요. 죽어도 변치 않을, 그러니까 상제님이 돌아가시는 것을 목격해도 너희들이 나를 변함없이 믿겠는지, 내가 죽은 이후에도 그 믿음이 변함이 없겠는지, 그걸 요구하신 걸로 봤을 때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그런 강력한 믿음이 필요하다는 거지요.
그 다음으로, 믿음을 통해서 우리가 완성되는 길을 가야 하는데, 아까 다른 분도 말씀하셨지만 믿음이 나날이 깊어지지 않으면, 그러니까 이치와 영성으로 나날이 깊어지지 않으면, 우리가 하느님을 내 안에 모시는 시천주와 근원자리 태을을 깨쳐 봉태을 하는 태을도인으로 완성되기 어렵다 생각을 합니다.
그 다음에, 이건 처음에 언급했던 부분하고 겹치는 건데요. 이 태을도인에게 믿음은 뭐냐.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는 이유라고 생각을 합니다. 다시 말해 이 시공간 속에 태어나서 이러한 모습으로 제가 지금 존재하는 그 이유가 바로 태을도인으로서의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뭔가 이 세상에서 역할이 있었기 때문에 이 생명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태어났을 것이고, 그 생명의 의미를 계속 찾는 것이 영성을 가진 사람의 존재이유라고 생각했었고, 그래서 태을도를 만난 것이고, 지금 우리가 이 태을도에서 해야 할 일은 뭐냐 하면 상제님과 고수부님 두 분이 행하신 천지공사와 신정공사를 바탕으로 이 땅에 완성된 세상을 구현하는 것이 우리의 몫인 거지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성사재인이고, 또 그 성사재인을 통해서 우리는 각자 완성되려고 하는 거지요.
이렇게 태을도를 만나서, 태을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내가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이유와 그리고 내가 앞으로 지향해야 할 역할과 또 내가 이루어내야 할 것들에 대한 의무를, 그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각성하고 계속 추진해 나갈 힘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외부의 시공간은 우리에게 객관적으로 주어진 환경이고, 그 시공간은 그 안에 깃들어있는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그 안에 깃들어있는 인간과 함께 완성되는 것입니다. 상제님께서도 일월 없는 천지는 빈 껍데기이고, 인간 없는 일월은 빈 그림자라고 하셨지요. 그 믿음을 가지고 우리 태을도인들이 이 땅에 온전한 태을 세상을 만들어감으로 해서, 내 믿음의 대상으로 출발했던 시천주와, 이 땅에 태을 세상을 만들고 또 태을을 통해서 내가 완성되는 봉태을을 동시에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장님 :
오늘 비가 좀 오다가 멈췄는데, 가물다 보니 비가 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잖아요. 지금 농촌에서는 모내기를 마칠 때가 되었는데 모도 못 내고 밭작물도 다 말라죽지, 하늘에 호소를 한다고요, 비를 좀 내려달라고. 그런 절박한 마음들이 하늘을 향해서 가면 하늘에서 어떤 응답이 있겠지요. 상제님이 천지공사 보실 때, 농민들이 간절하게 하소연하면 비도 내려주고 하셨거든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기적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 일반사람들이 전혀 상상하지 못한 역사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거든요. 일반 회사를 설립해서 운영하는 사람들이나, 어떤 사회적인 단체나, 더 나아가 정권을 창출한다든가, 더 나아가 나라를 세운다든가, 하는 첫 출발하는 사람들은 믿음의 선각자거든요. 믿음의 선배.
이 우주는 상제님 고수부님이 정음정양으로 한마음 한뜻으로 서로를 믿고서, 스스로 공부해서 태을을 깨쳐서, 깨친 만큼 또 믿음이 나오니까, 이 삼계를 움직일 수 있는 믿음을 가지셨다고요, 고수부님과 상제님 서로간의 믿음과, 두 분이 진리를 깨쳐서 얻은 진리에 대한 믿음, 태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상제님 고수부님 두 분의 믿음의 언약을 통해서 천지공사를 보시고 신정공사를 보셔서 급살병에서 다 죽게 된 천하창생들을 살리셨다고요. 믿음으로 천지공사를 보시고 믿음으로 신정공사를 보셨기 때문에, 우리도 상제님 고수부님과 같은 믿음을 가져야 천지도수를 성사재인해 나갈 수가 있다고요. 우리 스스로 후천 오만 년을 가는 그런 믿음을 가져야, 후천 오만 년 태을 세상을 만들 수가 있다구요. 웬만한 믿음을 가져서는 상제님 고수부님을 못 따라간다는 거죠.
증산상제님께서 전봉준 장군을 남조선배 도사공으로 삼으시면서 혈식천추도덕군자(血食千秋道德君子)를 말씀하셨는데, 그 혈식천추도덕군자들이 일심(一心)을 가졌다는 거예요. 일심으로 자기 자신을 믿었다는 거예요. 기본이 자기 자신을 믿는 거니까. 내가 날 못 믿으면 아무도 못 믿잖아요, 믿음의 근거가 없어져 버리는데. 이 세상은 믿음으로 세워가는 거라고요. 가정이 되었든, 작은 회사가 되었든, 나라가 되었든, 민족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간에 믿음의 기반위에 세워가는 거라고요. 믿음의 주체인 나한테는 이 세상을 만들어가는 대의명분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 대의명분에 대한 믿음을 확고하게 해서, 그 믿음의 신념체계 믿음의 대의명분으로 세상 사람들을 설득해서, 믿음의 가정, 믿음의 국가, 믿음의 사회를 만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 믿음 중에서 가장 상위의 믿음이 무엇인가 하면, 태을에 대한 믿음이에요. 태을에 대한 믿음을 누가 우리한테 깨닫게 해주고 알려주고 믿게 해주었느냐? 그건 상제님 고수부님이라는 거예요. 상제님 고수부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상위의 믿음으로 올라가는 거예요. 태을에 대한 믿음에도 단계가 있다는 거예요. 처음에는 우리가 태을을 몰랐잖아요. 상제님 고수부님이 있으시니까 태을을 알지, 우리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그래서 고수부님 말씀처럼 매사에 선통자가 있다는 거예요. 무슨 일을 하든지 선통자가 있기 마련이다, 선각자가 있기 마련이다. 선통자 선각자가 뭐냐? 먼저 알아서 깨쳐서 믿음을 주는 사람이 선통자요, 선각자인 거예요.
지심대도술 태을 세상을 만들어가는 선각자가 누구냐? 태을도인이라는 거예요. 태을 세상을 만드는 믿음의 선각자들이 태을도인이라는 거예요. 우리의 믿음이 태을로 꽉 차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우리의 믿음이 상제님 고수부님으로 꽉 차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태을도인에게 믿음이란, 시천주 봉태을로 꽉 차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본래 시천주 봉태을의 존재이기 때문에, 내가 시천을 깨치고 태을을 깨쳐서 명실상부하게 내가 천주의 성품을 되찾고 태을신성과 생명력을 회복하는 만큼 내가 나를 믿게 된다고요. 믿음은 뭘로 유지가 되냐? 깨침에 의해서 알음에 의해서 믿음이 유지가 된다고요. 내가 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내가 가진 시천과 태을을 깨친 만큼 내가 나를 믿는 거예요, 사실은. 그 믿음의 결과로 천주의 품성을 내가 되찾게 되는 거고, 태을신성과 생명력을 회복하게 되는 거예요.
상제님은 동물의 성정을 버리고 진리의 사랑을 하라는 거거든요. 믿음을 어떻게 표출하냐? 진리의 사랑으로 표출한다는 거예요. 상제님 고수부님을 어떻게 증명하냐? 진리의 사랑으로 증명한다는 거예요. 태을에 대한 믿음을 어떻게 증명하느냐? 진리의 사랑으로 증명한다는 거예요. 태을도인에게 믿음이란, 진리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란 거예요. 나에 대한 진리의 사랑을 내가 실천해야 하고, 내 가족에서 부모님을 잘 괴이고 내 형제를 공경하고 내 배우자를 잘 대우하고 내 자식을 자애롭게 대하고, 이것이 진리를 실천하는 것이라는 거예요. 그것이 사회와 국가와 세상으로 확장되어나가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수신제가 치국평천하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태을도인이 태을을 깨친 믿음, 그 믿음을 가지고 대시국을 건설해가는 거예요.
오늘 6월 월례치성을 모셨는데, 이 귀중한 시간과 공간을 인천법소에서 함께 했다고 하는 것은 우주의 기적이에요. 증산상제님이 천지공사 보시고 고수부님이 신정공사 보신 그것을 태을도인들이 성사재인하는 기적이라고요. 오늘 모인 것 자체가 기적인 이 역사가 삼계에 새겨지겠지요. 우리가 아까 사진도 찍고 했지만, 내가 스스로의 믿음을 이 자리에 와서, 이 시간에, 확인한 거라고요. 상제님 고수부님께서 태을을 깨쳐서 태을의 믿음을 가지고 태을 세상을 만들어가는 천지공사 신정공사를 보셨듯이, 우리 태을도인들도 상제님과 이심전심이 되어서, 상제님 고수부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태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태을 세상을 만들어가는 데 혼신을 다합시다. 다같이 훔치! (태을도인 일동) 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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