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봉광장

[스크랩] 허물을 자신에게 돌려야 속 눈이 크게 떠진다

태을세상 2014. 8. 31. 23:21

 ‘없는 허물이라도 스스로 찾아내 서둘러 고치라’는 가르침과 ‘하늘나라의 슬로건은 참고 또 참으라는 이 한 마디뿐’이라는 가르침

 

(1) 밖에서 들어온 신앙과 안에서 생긴 신앙 사이에 여러 가지 일들이 생겼을 겁니다. 불교던 기독교던 처음에는 막대한 인명손실을 가져오지 않았습니까? 오지의 원시종족들처럼 ‘허가 없이 함부로 들어선 발을 거침없이 쓰러뜨리고 부러뜨리는 것’이 아주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을 겁니다.

 

 증산을 따르는 이들과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한반도에서 갑자기 마주쳤을 테니 왜 기이한 일들이 없었겠습니까? 서로가 서로를 잘 모르니 제 신앙 밖의 일에 전혀 애정이나 이해가 없었을 겁니다. 만나지 않는 게 서로 상책이지 일단 만나면 서로가 ‘건널 수 없는 강’을 발견하고 질겁을 했을 겁니다.

 

“하루는 형렬(亨烈)이 밖에 나갔다가 예수교인에게 큰 패욕(悖辱)을 당하고 돌아와서 상제님께 그 일을 아뢰니 가라사대 ‘청수(淸水)를 떠놓고 스스로 허물을 살펴 뉘우치라.’ 형렬이 명하신 대로 하였더니 그 뒤에 그 예수교인이 병들어서 사경(死境)에 이르렀다가 어렵게 살아났다 하거늘, 형렬이 듣고 아뢰니 가라사대 ‘이 뒤로는 그런 일을 당하거든 조금도 그를 원망하지 말고 스스로 몸을 살피라. 만일 허물이 네게 없을 때에는 그 독기(毒氣)가 본처(本處)로 돌아가나니라.’”(대순전경 p127)    
   
 참으로 신기한 장면이 아닙니까? 보통사람 같았으면 귀신이 어쩌고 저쩌고 하며 말꼬리를 끝없이 이어갔을 법한데도 증산은 도리어 ‘사람의 몸가짐과 마음가짐’ 쪽으로 문제 해결의 방향을 백팔십 도 돌려 놓았습니다. ‘원망 없는 세상을 열어 놓으려면 모든 허물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야 한다’는 아주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이치를 알기 쉽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증산은 또 “파리 죽은 귀신이라도 원망이 붙으면 천지공사가 아니다”(대순전경 p327)라고 가르쳤습니다. ‘원망 없는 세상이 되려면 사람들이 얼마나 그 원망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가’를 ‘파리 귀신’을 빗대어 우화적으로 설파한 겁니다.

 

 증산은 이미 훤히 꿰뚫어보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제자가 예수교로부터 욕을 먹은 것이 아니라 예수교인을 자처하는 사람으로부터 욕을 얻어먹은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종교 차원의 문제나 초월세계 그 자체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끼리의 허물 찾기, 흠집 찾기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겁니다.

 

 정작 ‘죄’가 뭔지도 잘 모르면서 그저 상대의 허물이나 흠집을 찾으려 애쓴다는 사실을 경계한 겁니다. 눈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옷 매무새나 몸놀림이나 말투, 말씨를 가지고 서로 못 잡아 먹어 으르렁거린다는 사실을 지적한 겁니다. 사람이 사람을 발견하는 유일한 통로는 오직 하나, 눈과 눈이 마주치는 그 짧은 순간뿐입니다. 눈동자만이 생명이 지닌 영적인 에너지, 영적인 속성을 슬쩍슬쩍 보여주고 살짝살짝 엿보게 합니다.


(2) 예수는 십자가 형틀 위에 달려 죽게 될 순간을 앞두고도 평소의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전혀 잃지 않았습니다. 한밤중에 배반한 제자 가룟 유다를 앞세우고 일단의 군대와 고발자들이 벼락같이 들이닥쳤지만 평소의 모습 그대로 였습니다.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둥이를 가지고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누가복음 22.52-53; “Have you come out, as against a robber, with swords and clubs? When I was with you daily in the temple, you did not try to seize Me. But this is your hour, and the power of darkness.”)

 

 사랑하는 제자 몇 명만을 데리고 어둠에 싸인 산 위에 올라 땅바닥에 이마를 대고 피땀 흘려 기도하고 있던 예수였습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외아들로 소개하며 온갖 기적과 기이한 말들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던 스승이 타락한 유대교 지도자들과 그들의 군대에게 붙잡혀 가게 되자 수제자 베드로는 그만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갑자기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부하인 ‘말고’(Malchus; 요한복음 18.10)의 오른 편 귀를 싹둑 잘라내고 말았습니다.

 

 예수는 “이것까지 참으라!”(Permit even this; 누가복음 22.51)고 말한 뒤 “어서 칼을 칼집에 꽂아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Put your sword into the sheath. Shall I not drink the cup which My Father has given Me?; 요한복음 18.11)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피가 철철 흐르는 귀를 만져 낫게 해 주었습니다. 흐르는 피와 온몸으로 퍼져가는 고통보다 들리던 소리가 갑자기 들리지 않게 된 것이 가장 두려웠을 겁니다. 예수는 그 다급한 위기상황에서도 침착한 어조로 두려움에 떨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수제자 베드로(Simon Peter)에게 말했습니다.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마태복음 26.52-54)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마태복음 26.56)  

 

 백 가지 말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예수는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이의 ‘놀라운 모습’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좀처럼 변하지 않는 돌보다 더 단단한 사람들의 심성을 줄기차게 두드리고 문지르며 한결 같은 모습으로 ‘하늘나라를 바라보라! 하늘나라에 들어갈 채비를 철저히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 장가가는 세상 일이 끝나면 바로 뒤이어 하늘나라 들어갈 일만 남아있다’고 목이 쉬도록 거듭 역설했습니다.

 

(3) 증산이 바라본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예수가 바라본 세상은 또 어떠했을까요? 증산은 이미 당시의 모든 초월적 상념들을 두루 접했을 겁니다. 예수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기록들, 하늘나라에 관한 모든 이야기들을 속속들이 다 꿰고 있었습니다. 특히 ‘예수 자신’에 관한 기록들과 이야기들에 주목하며 자신이 걸어갈 길과 마무리 지을 일들을 수없이 묵상했을 겁니다.

 

 공통점은 ‘끝없는 인내’입니다. 오로지 진리의 세계, 하늘의 세계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일상은 대자연의 한 부분으로 다가왔을 뿐입니다. 다만 ‘사람만이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에게만 특별한 소망을 갖고 사람에게만 진리의 세계, 하늘의 세계를 보여주려 했습니다.

 

 사람의 수준을 넘어서서 보다 높직한 위치에서 사람들의 일상을 바라다본 초월자들이었으니 분명히 보다 많은 것을 보고 느꼈을 겁니다. 더욱이나 늘 ‘하늘나라’를 중심에 놓고 세상을 그저 자그마한 한 귀퉁이쯤으로 여기고 있었을 테니 사람들의 티격태격과 갈팡질팡이 참으로 한심하고 가엾게 다가왔을 겁니다.

 

 그래도 사람들에게 하늘나라를 이야기하고 하늘의 계획을 귀띔해 주려 무척 애를 썼다는 사실이 다시 생각해도 정말 기적입니다. 자질구레한 투정과 다툼에까지 일일이 눈길을 주며 ‘너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라. 끝까지 참고 또 참아라.’고 가르쳐준 덕택에 세월은 변하고 달라졌지만 아직도 생생한 목소리로 뭇 사람들에게 다가오고 있는 겁니다.

 

 사색 자체만으로도 나라 전체의 정신적 브랜드 가치가 올라갑니다. 사색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민족 전체의 윤리지수, 도덕지수가 올라갑니다. 만일 사색으로 그치지 않고 그 사색의 결과물을 이웃과 나라 전체로 퍼뜨리면 나라와 민족이 달라지고 세계 인류의 형편이 나아집니다.

 

 증산은 한반도에 발붙이고 사는 한민족에게 새로운 가르침을 주고 자자손손 이어 걸어갈 보다 높은 길을 닦아준 겁니다. 예수는 팔레스타인과 로마와 그 이웃나라들을 향하여 하늘의 놀라운 메시지를 전하고 ‘모두가 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고귀한 영혼들’임을 십자가 고난과 부활로서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증산은 사람이 감히 따라 하기 어려운 ‘발상의 대전환’을 몸소 보여주며 세상의 나날이 전부가 아니라 보다 광활한 우주의 사계절이 따로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는 태초 이전부터 이미 확정된 ‘메시아 약속’이 바로 자신임을 반복해서 드러내며 ‘아버지 하나님 한 분만이 땅과 하늘의 영원한 주인임’을 생명을 버리기까지 일관되게 가르쳤습니다.

 

 증산의 가르침으로 한민족의 영혼이 한층 더 웃자라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가르침으로 통일한국의 미래가 탄탄대로에 서서 잘 사는 섬나라 일본과 아시아의 거인으로 재등장하는 중국 사이에서 기죽지 말고, 오히려 약동하는 동북아 질서의 한 가운데 우뚝 서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 태을도(太乙道) : 태을궁 용봉서신(太乙宮 龍鳳書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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