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증산은 못된 성깔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일들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뿌리도 모르고 형체도 알길 없는 그 못된 성질 때문에 세상의 이치가 가려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짐승의 발톱과 송곳니로 뒤덮인 ‘피밭’이 생기게 된다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종도 한 사람이 무슨 일로 남과 다투고 분해하며 복수하기를 말하니 들으시고 가라사대 ‘세상사람들은 말하기를 돌로써 치면 돌이요 떡으로 치면 떡이라 할 것이라. 그러나 너희들은 돌로 치는 자에게 돌로 하지 말고 떡으로써 하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너희들은 말하기를 세상에 대적할 것도 많고 다스릴 것도 많다 하나 이는 곧 너로 말미암아 대적할 것도 많아지고 다스릴 것도 많아짐 이라.’ 하시니라”(정영규의 천지개벽경 pp290-291)
“하루는 제자가 상제님께 여쭙기를 ‘어떤 사람이 잘못을 계속하여 범하면 어떻게 합니까?’ 상제님 말씀하시기를 ‘계속해서 용서해 주거라. 허물은 죄지은 자에게 있을지언정 덕은 용서해 주는 너희에게 있느니라.’”(이중성의 천지개벽경 p132)
‘돌 대신 떡으로 치면 떡이 되지만 떡 대신 돌로 치면 돌이 되고 만다’는 증산의 촌철살인(寸鐵殺人)의 한 마디에서 ‘살을 맞대면 서로가 따스하지만 뼈를 서로 부딪히면 참을 수 없이 아프기만 하다’는 그 간단한 이치를 다시 한 번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살로 살을 때릴 수는 없습니다. 뼈마디를 망치 삼고 몽둥이 삼아 때리고 부수는 겁니다.
그리고 ‘너 때문에 세상에 원수 질 일이 많아지고 바르게 고쳐놓기 위해 애써야 하는 일도 나날이 늘어난다’는 증산의 지적에서 ‘나’라는 존재의 의미를 다시 한번 곰곰이 곱씹어보게 됩니다. 좋은 일도 나 때문이고 나쁜 일, 못된 일, 몹쓸 일도 모두 나 때문이라는 사실에 그만 화들짝 놀라게 되고 맙니다.
그러면서 ‘나를 떡으로 삼고 세상을 살면 세상 자체가 떡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놀라운 사실에 스스로 눈 뜨게 됩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돌처럼 굳어진 나, 돌로 변해가고 있는 나를 부드럽고 향기로운 떡으로 만들어 갈 수 있을지 몰라 그저 속만 바싹바싹 태우게 됩니다.
나이 들며 변해 갑니다. 세상을 살며 변해 갑니다. 사람들을 만나며 변해 갑니다. 사람들의 경험담, 실패담을 들으며 변해 갑니다. 곁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들과 참아내기 힘든 일들 때문에 알지 못하며 변해 가고 알면서 변해 갑니다.
단단해 지고 있습니다. 굳어져 가고 있습니다. 차츰차츰 굳어져 가고 있는 탓에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지조차 잘 모릅니다. 하여튼 아이 때의 눈길과 다르고 어제의 마음가짐과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나’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나’를 잊어가고 있습니다. ‘나’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오로지 ‘남’과 세상에 대한 관심만 높아가고 있습니다. 거울 속 모습에 취해가느라 거울 앞에 서 있는 자기자신은 까맣게 잊고 삽니다.
그러니 ‘나’로 인해 생겨나는 일들, ‘나’ 때문에 빚어지는 일들이 좀처럼 눈에 띄지 않게 된 겁니다. 그래서 돌끼리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온갖 잡소리와 눈 따가운 불똥, 불빛에 몸이 상하고 혼이 갉아 먹히게 된 겁니다.
증산은 ‘너희가 돌에서 떡으로 변해가야 상극의 어지러운 세상에서 상생의 조화로운 세상으로 옮겨간다’고 가르칩니다. 증산은 ‘너부터 먼저 단단한 돌에서 부드러운 떡으로 변해야 원한과 원수로 가득 찬 세상이 은혜와 은인으로 가득 찬 세상으로 바뀌어 갈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내가 돌인지 떡인지’부터 곰곰이 되씹어 보고 나서 세상을 다시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돌로 변해 있는 네가 먼저 완전히 부서져 가루가 된 뒤에라야 비로소 사람 탓, 세상 탓이 있을 법하다’고 따끔하게 꼬집습니다. ‘돌로 변해버린 사람이라면 이미 아무 쓸모가 없다’고 경고합니다.
하지만 증산은 ‘돌도 사람이고 떡도 사람이니 둘 중에 하나를 잘 택해야 한다’고 가느다란 희망을 던져 줍니다. ‘뭐든 사람이 하기 나름이고 사람이 마음먹기 나름이니 똑바로 보고 제대로 잘 고르라’고 신신당부합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떡이 되어 좋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동참하고 그 좋은 세상에서 주인공이 한번 되어보라’고 부추깁니다.
생명을 해치고 멍들게 하는 돌에서 생명을 먹이고 입히고 기운 내게 하는 떡으로 변해가라고 명령합니다. ‘너부터 먼저 떡으로 변해야 남도 덩달아 부드러운 떡이 되고 세상도 아울러 부드럽고 푸짐하고 향기로운 떡이 된다’고 역설합니다. ‘나와 떡이 평형을 이루고 완전히 등식화 되어야 우주의 가을과 겨울이 제대로 열려 후천 오만 년이 성큼 다가온다’고 예언합니다.
‘나=떡’으로 완전히 고정된 사람만이 선천세계와 후천세계 사이의 벼락치고 땅 갈라지고 죽을 병 판치는 개벽시기에 오히려 완전한 생명, 온전한 사람으로 다시 살아난다고 예언합니다.
(2) 예수는 위선자들을 무척 미워했습니다. 저도 못 지키는 계명을 갖고 남을 욕하고 시비하고 매질하는 바리새파(Pharisees) 지도자들, 사두개파(Sadducees) 지도자들을 몹시 미워했습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 큰 길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고 하나님에 속한 하나님의 물질을 갖고 거드름피우는 부자들을 무척 걱정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장로들(elders)과 서기관들(scribes)이 백성을 이끌고 가르치고 사랑하기는커녕 도리어 불쌍한 백성을 괴롭히고 고단하게 하는 것을 항상 경고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마태복음 23.23-24; “Woe to you, scribes and Pharisees, hypocrites! For you pay tithe of mint and anise and cummin, and have neglected the weightier matters of the law: justice and mercy and faith. These you ought to have done, without leaving the others undone. Blind guides, who strain out a gnat and swallow a camel!”)
예수의 지적은 너무나 현실적이고 상식적이었습니다. 그런 탓에 지적 당하고 표적시 되는 지도층 인사들은 예수라는 이름만 들어도 속이 뒤집히고 눈이 부라려 졌습니다. 눈엣가시였고 오장육부 여기저기에 붙어있는 괴로운 병원(病原)이었습니다.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구나.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마태복음 23.25-26; “You cleanse the outside of the cup and dish, but inside they are full of extortion and self-indulgence. First cleanse the inside of the cup and dish, that the outside of them may be clean also.”)
“회 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구나.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구나.”(마태복음 23.27-28; “You are like white-washed tombs which indeed appear beautiful outwardly, but inside are full of dead men’s bones and all uncleanness.”)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해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자식이 되게 하는구나”(마태복음 23.15; “You travel land and sea to win one proselyte, and when he is won, you make him twice as much a son of hell as yourselves.”)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마태복음 23.4-5; They bind heavy burdens, hard to bear, and lay them on men’s shoulders; but they themselves will not move them with one of their fingers. But all their works they do to be seen by men.”)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는구나.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마태복음 6-8; “They love the best places at feasts, the best seats in the synagogues, greetings in the marketplaces, and to be called by men, ‘Rabbi, Rabbi’; for One is your Teacher, the Christ, and you are all brethren.”)
사람자체가 미운 게 아니라 소행이 밉다고 말합니다. 지도층의 무책임과 위선과 가식을 꼬집고 있습니다. 대접받기 즐기고 군림하기 바라고 겉만 번드르르하게 꾸미기 좋아하는 지도층 인사들, 지식층 인사들, 부유층 인사들을 혹독하게 매질하고 있는 겁니다.
가르치는 자의 책임과 윤리는 가르침을 받는 백성의 그것들에 비해 차원이 다르다고 강조합니다. 죄의 무게를 재는 저울이 다르고 상금을 정하는 기준이 다르다는 겁니다. 장님이면서 장님인 줄을 모르고 눈 뜬 사람들의 길잡이 역할을 자청했으니 그 죄악이 실로 아주 크다는 겁니다. 바로 이끌어주기는커녕 저도 못 지킬 계명과 관습을 강요하고 그걸 기준으로 정죄하기를 서슴지 않았으니 그저 한낱 실수 정도로 넘길 수는 없다는 겁니다.
(3)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이고 과시적인 행태를 호되게 꾸짖고 있는 예수의 음성은 수제자 차경석(車京錫 혹은 京石): 1880-1936; 후일 정읍 대흥리에서 ‘보천교’를 창시하여 1926년 ‘사이토 마코토’ 일본총독이 직접 본부를 찾을 정도로 큰 세력을 모았으나 그의 사후 총독부에 의해 강제 해산 당함)의 양반행세를 질타하는 증산의 음성과 너무도 흡사합니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초월적 혜안을 지녔던 특별한 선각자들은 한결같이 ‘바람직한 몸가짐과 마음가짐’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겁니다.
“경석이 모든 행동에 위엄을 내며 양반의 기습(氣習)을 본뜨거늘 가라사대 ‘대인의 공부를 닦는 자는 항상 공근(恭謹)하고 온화한 기운을 기를지니, 이 뒤로는 그런 기습을 빼어버리라. 망하는 기운이 따라 드느니라.’”(대순전경 p319)
예수는 어느 날 아침에 유대교 성전에 앉아 ‘길 잃고 헤매는 가엾은 양떼’ 같은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한데 그때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밖에서 들려 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곧 이어 기세등등한 한 떼의 사람들이 갑자기 들이닥쳤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가 종교적 권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독점하고 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의해 예수 앞에 질질 끌려 왔습니다. 예수를 시험하여 핍박할 구실을 찾기 위한 악의적인 술수였습니다. 예수는 이미 모든 상황을 한 눈에 꿰고 있었습니다. 붙잡혀 온 여인보다 그녀 뒤에 서있는 소위 지도층 인사들이라는 작자들의 심보나 소행이 훨씬 더 예수의 마음을 어지럽게 뒤흔들어놓았습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했는데 선생은 과연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한복음 8.4-5; “Teacher, this woman was caught in adultery, in the very act. Now Moses, in the law, commanded us that such should be stoned. But what do You say?”)
예수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몸을 굽힌 채 손가락으로 땅에 뭔가를 쓰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그들의 앞잡이들은 ‘뭐라고 좀 말 해보시오!’라며 시끄럽게 졸라댔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아무 말 없이 딴전을 피우던 예수는 굽힌 허리를 펴고 반듯이 서서 딱 한 마디만 말했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요한복음 8.7; “He who is without sin among you, let him throw a stone at her first.”)
그 말 한 마디만 던지고는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뭔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John 8.8; And again He stooped down and wrote on the ground). 살기등등하던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어른부터 젊은이까지 하나, 하나 건물 밖으로 나갔습니다.’(요한복음 8.9; Then those who heard it, being convicted by their conscience, went out one by one, beginning with the oldest even to the last)
예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 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서야 그 죽을뻔한 여자에게 말했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요한복음 8.10; “Woman, where are those accusers of yours? Has no one condemned you?”)
“주여, 없나이다.”(요한복음 8.11; “No one, Lord.”)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할 테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한복음 8.11; “Neither do I condemn you; go and sin no more.”)
예수는 항상 미래진행형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이제까지의 네 모습에 눈길을 주기보다 앞으로 펼쳐질 네 앞길에 더 눈독을 들이라’고 말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임종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옆에 달린 한 죄수의 참회와 믿음을 보고 그 즉시 ‘천국동행’을 약속했습니다. 간통 현장에서 잡혀 돌에 맞아 즉사하고말 한 여인에게는 ‘가서 다시는 죄짓지 말고 잘 살아야 한다’며 되레 수치와 공포에 억눌린 여인을 한껏 자유롭게 해 주었습니다.
‘돌 대신 떡으로 치라’는 증산의 계명과 ‘지난 죄를 묻지 않을 테니 어깨 쭉 펴고 자유롭고 떳떳하게 잘 살라’는 예수의 훈방에서 21세기 상생의 참 도리를 읽을 수 있습니다. ‘미운 놈 떡 한 개 더 주라’는 그 흔한 속담 하나도 제대로 못 지키는 알량한 우리지만, 21세기를 맞아 이왕 새로운 패러다임을 세워야 한다면 우리 모두 증산과 예수의 생애에서 톡톡히 배워야 합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해선 안 된다’는 말이나 ‘죄가 밉지, 어디 사람이 미우냐?’는 말에서 진작 배웠더라면 툭하면 송사로 날을 새우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여차하면 막무가내로 사생결단을 무릅쓰는 사나운 세태가 한참 잦아들었을 겁니다.
이제라도 증산의 ‘떡 팔매질과 떡 매질’에서 참다운 이웃관계를 회복합시다. 이제라도 더 늦기 전에 예수의 ‘과거를 전혀 캐묻지 않는 경계 없는 관용과 조건 없는 용서’에서 한민족 나름의 ‘정 깊은 공동체 정신’을 본격적으로 일으켜 세웁시다.
먹고 살만 해 질수록 도덕적 기준도 한층 더 높아져야 합니다. 일만 불 시대를 지나 이만 불 시대로 다가갈수록 육체적, 정신적 웰빙(wellbeing)에서 영적인 웰빙(spiritual wellbeing)으로 한 걸음씩 옮겨가고 다가가야 합니다. 동네 골목, 도회지 거리에 발이 묶이지 말고 세상과 인류와 우주의 미래로 시야를 과감히 확장해야 합니다. 꿈 속에서 보던 ‘신들만의 세계’를 우리들 주변에 훔쳐다 놓고 빌려다 놓아야 합니다. ‘신들의 마음씨, 신들의 눈길, 신들의 꿈꾸기’를 우리들 곁으로 조금씩 끌어당겨야 합니다.
21세기 휴매니즘은 인간의 그렇고 그런 나날에 눈높이를 고정시켜 두면 절대 안 됩니다. 21세기 한민족의 걸음걸이를 젊은이들의 환상과 늙은이들의 골인 점 더디 들어가기에 가만히 묶어둘 수 없습니다.
동학을 일으킨 백 수십 년 전의 선각자들만큼이라도 정신세계와 영적인 세계에 관심을 더 기울여야 합니다. 세상에 묶이고 눌린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초월세계 쪽으로 선뜻 향하도록 우리의 까칠까칠한 발뒤꿈치를 한껏 높여야 합니다.
증산이 우리에게 21세기 화두를 던지고 있습니다. 예수가 동방의 횃불로 자리 잡은 한민족을 향해 ‘21세기 동북아시대의 유일 중심이 되라’며 몸을 굽혀 땅에다 뭔가를 정성 들여 쓰고 있습니다.
21세기 휴매니즘을 세운 민족과 나라가 21세기의 리더가 됩니다. 21세기 ‘변화의 소용돌이’에 걸맞은 초월적 이념을 정립한 민족이 21세기 세계질서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를 겁니다. 신의 이름을 빗대 살인을 밥 먹듯이 하는 민족과 나라는 결코 21세기의 중심에 설 수 없습니다. 초특급 인터넷 시대가 세계를 감시하고 있습니다. 속일 수 있고 감출 수 있던 아날로그 시대는 이제 완전히 사라질 겁니다.
심성은 아직 어둡고 거칠지만 음모와 죄악을 실어 나르는 인터넷 정보망만은 정말 무시무시할 정도입니다. 이미 훔쳐먹은 ‘선악과’ 외에 이제 곧 ‘생명나무(the tree of life) 과일’(창세기 3.22;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을 몰래 빼내올 묘안을 짜내게 될 겁니다.
선각자들의 초월적 사색에서 21세기 세상을 이끌어갈 ‘대표이념’을 찾아야 합니다. 죽여 없앨 대상을 찾아나서는 핏발 선 눈은 그저 잠시 타오르다 사라질 지독한 광기일 뿐입니다. 그런 표독스러운 살기에 한 발을 담그고 있는 종교나 주장은 결코 21세기의 초월적 화두가 될 수 없습니다.
아이는 보폭이 짧아 좁은 개울도 제대로 건너 뛸 수 없습니다. 하지만 보폭이 큰 어른은 웬만한 개울이라도 펄쩍 건너 뛸 수 있습니다. 오늘의 종교적 분파놀음에 눈 높이를 맞추다 보면 다가올 몇 십 년을 건너뛰어 새 지평을 열어놓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잡다한 주장들에 얽매이다 보면 도랑 앞에서 쩔쩔매는 어린아이 꼴이 되고 맙니다.
최소한 증산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최소한 예수의 가르침에 영의 눈을 크게 뜨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땅과 하늘을 번갈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증산과 예수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몸을 틀어야 합니다.
한반도의 기운을 딛고 천하를 바라본 증산이 우리의 스승입니다. 지중해로 열려 있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얽히고 설킨 세상을 바라보며 무엇보다도 ‘곤고한 사람들의 고단한 삶’에 온 정성을 쏟았던 예수가 바로 우리들의 표상입니다. 한반도를 관통하는 세계정신, 우주정신을 캐보기 위해 증산이 꼭 필요합니다. 사람과 절대자의 운명적인 관계를 캐묻기 위해 예수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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