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을도 도훈(道訓)

[스크랩] 한로치성 태을도인 도훈 "성심의 힘으로"

태을세상 2016. 10. 11. 18:57

한로치성 태을도인 도훈

 “성심(誠心)의 힘으로”

2016년 10월 8일(음력 9월 8일)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합니다. 낮에도 그늘진 곳은 냉기가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여름이 언제 가나 싶더니, 겨울옷 꺼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절기는 어김없이 진행되는데, 나는 제대로 준비하고 있나, 참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오늘, 한로를 맞아 “성심의 힘으로”라는 주제로 도훈을 해보겠습니다.

 

@ 정미년 늦은 가을에 상제께서 순창 회문산 오선위기 도수를 취하여 천지공사를 보신 후 현 칠보면 행단에 이르시더니, 경석을 돌아보시며 가라사대 “내 일에는 수부공사가 있나니, 네가 참으로 일을 하려거든 수부를 들여세우라.” 하심으로 경석은 유념하였더라.

상제께서 그 길로 정읍군 대흥리에 오시어 경석의 집에 계시니라. 이때에 경석의 형편은 동학을 추종하다가 가산이 탕진되어 곤궁한 처지라, 깔아드릴 자리조차 마땅한 것이 없어서 이종매씨의 혼석 자리를 빌려다 깔아드렸던 바, 이 때에 감주를 드시다가 사발이 미끄러져 자리에 엎질러지니, 이를 본 경석이 걸레를 가지러 간 순간에 상제님께서 붉은 손수건으로 닦으시니, 자리에 붉은 물이 얼룩지더라.

그 후 상제께서 구릿골로 가신 후에 자리를 닦으나 이미 들은 물이 종시 지지 않거늘, 경석이 그 자리를 가지고 이종매씨에게 가서 사유를 말하며 미안하다고 말씀을 아뢰더라.

그 후에 상제께서 오시어 경석에게 가라사대 "천지에 독음독양이면 만사불성이니, 내 일은 수부(首婦)가 들어야 순서진행 하나니라." 하시며 "수부를 택정하리라." 하시고, 경석에게 정면하사 가라사대 "네가 전일(前日)에 수부를 인권한다 하더니 어찌 되었느냐." 하시는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경석의 생각에 이종매씨가 떠오르더라. 그러나 이종매씨는 홀로 된 지가 이제 겨우 석 달밖에 되지 않았는 데, ...(중략)... 경석이 상제께 여쭈어 가로대 "지금 안채로 들어간 분이 저의 이종매오이다. 수부로써 어떠하나이까." 하고 사뢰니, 상제 가라사대 "수부를 지척에 두고 미정이로다." 하시며, "속히 주선하라. 공사지연이로다." 하시니라. 경석이 바삐 안으로 들어와서 매씨에게 여쭙기를 "사랑에 계시는 선생님께서 천지공사를 하시러 하는 바, 이 공사에는 수부도수를 정하신다 하니, 매씨께서 수부의 소임을 맡으심이 어떠하리오." 하니 고후비께서 흠쾌히 승락하심으로, 이로써 수부택정공사를 정미(1907)년 동짓달(11월) 초사흗날 행하시더라. (선도신정경 pp25-27)

 

   인용이 좀 길었지만 상제님과 고수부님이 언제 어떻게 만났는지, 또 상제님의 고수부님을 맞아들이기 위해 예비하시는 모습이 잘 드러나는 구절입니다.

 

   다들 잘 아시는 얘기이겠지만, 증산상제님과 고수부님의 만남은 1907년 음력 11월 수부택정공사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증산상제님이 구릿골에서 돌아가신 1909년 음력 6월까지는 불과 1년 반 정도입니다. 상제님께서 그 사이 계속해서 여러 곳을 오가며 천지공사를 보셨으므로, 두 분이서 같이 지낸 기간은 그보다 훨씬 짧을 것입니다. 심지어 고수부님은 상제님이 돌아가신 것도 몰랐더랬습니다.

 

   위 인용한 구절에서 다 짐작하셨겠지만, 전 남편과 사별한지 불과 석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젊은 청상과부가 소위 신발을 바꿔 신은 겁니다. 그곳 대흥리가 전 남편 집안인 신씨 집성촌이었다는데, 여간한 배포도 아니지요. 당연히 사람 취급을 못 받았습니다. 그런데 증산상제님께서 수부공사를 은밀히 보신 것도 아니고, 우리가 아는 것만 해도 여러 번 수십 명씩 사람들을 모아서 떠들썩하게 공사를 보셔놓고는 그렇게 일찍 덜컥 돌아가버리신 겁니다. 너무나 무책임하게...

 

@ 증산상제께서 수부공사(首婦公事)를 보실 새, 대흥리 차경석의 사랑에 삼십여 명을 모아놓고, 가라사대 "정읍이라 하는 곳은 왕자포정지지(王子布政之地)요, 정(井) 자는 새암 정자 아니냐. 수부로 하여금 이를 번갈아 밟고 들어오라 해라." 하시며, 대학경 한 권과 부(符)를 그린 부도책 한 권을 주시더라.

고수부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방에 들어오니, 고수부께 웃옷을 벗고 누우라 하사, 상제님께서 큰 장도칼을 가지시고 고수부님의 배 위에 걸터앉아 칼을 고수부님 목에 겨누시며, 가라사대 "죽어도 나를 섬기겠느냐. 그리고 천지대업에 있어서 중도에 변개함이 없으렷다." 하시며 다짐하시니, 고수부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찌 변개함이 있아오리까." 하시니, 상제께서 기뻐하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그렇지." 하신 후에,

인하여 상제께서 누우시어 상제님 배 위에 고수부님을 앉히시고 그와 같이 다짐받도록 하실 새, 고수부 가라사대 "나를 일등으로 정하여 주시렵니까?" 하고 다짐을 받으시니, 상제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일등수부로 정하리라." 하시거늘, 고수부께서 가라사대 "이 다짐은 변개함이 없어야 하오리다." 하시니, 대답하시기를 "대인의 말에는 천지가 쩡쩡 울려나가나니, 오늘의 이 다짐은 털끝만치도 어김이 없으리라. 이것이 천지대도의 수부공사이니 만민의 어머니가 되려면 이와 같이 공사를 맡아야 되느니라." 하시며 부를 그려 불사르신 후, 가라사대 "세상사람이 내가 누구인지만 알아도 반도통은 열려야 하느니라." 하시더라. (선도신정경 pp28-29)

 

   상제님이 돌아가신 것도 모르고 계시던 고수부님께, 돌아가신지 몇 달 후 수행 중에 초빈이 보이고 밤중에 상제님이 오셔서 이별가를 부르고 사라지시고 하면서 드디어 의혹이 생겨 차경석 성도에게 다그치지만, 별 뾰족한 대답을 듣지 못합니다. 드디어 바깥출입을 별로 하지 않아서 주변 지리도 잘 모르던 고수부님이 구릿골로 무작정 가서는 상제님 초빈을 찾아냅니다. 뒤따르던 차경석 성도가 말려보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초빈을 헤치는 고수부님 앞에 여전히 생생해보이는 상제님의 죽은 모습이 드러나고, 고수부님은 상제님이 생전에 주신 비단주머니를 열어 쌀 세 톨과 진주 한 알로 망자 가는 길을 수습하고는, 상제님 친필로 ‘옥황상제’라 쓰신 백노지쪽을 가슴에 올려드립니다. 1911년 봄, 고수부님은 대원사에 들어가 상제님 성령을 모시고 혼례식을 행하시고 49일간 진법수련 후, 그해 9월 19일 상제님 어천치성 후에 성령의 접응을 받아 신정(神政)을 시작하십니다. 그 후 22년간 대흥리, 조종골, 용화동 세 살림을 차례로 맡아 하신 후 오성산 도장에서 3년 요양하시다 1935년 10월 5일 화천하시어 증산상제님 곁으로 돌아가십니다.

 

   이렇듯, 상제님과 헤어지신 후 고수부님은 증산을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으며, 평생을 변함없이 ‘태을주 포교’ 한 길을 꼿꼿하게 걸어가셨습니다. 무엇이 고수부님을 상제님께 충성하게 만들었을까요? 상제님의 잘 생긴 용모 때문이었을까요? 아님 상제님의 조화권능으로 행한 기행이적 때문이었을까요?

 

   상제님께서 생전에 고수부님과 함께 앉아 차경석에게 동상례를 받게 시켰을 때, 고수부님은 “죽으면 한 번 죽을 것이요, 두 번 죽지는 못하리라.” 하시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신 적이 있습니다. 상부(喪夫)한지 석 달도 안 되어 상제님의 수부택정공사에 응하신 기백이나 여러 공사 중에 보이신 배포로 보아, 고수부님은 기행이적으로 승복하실 분은 아니지요. 고수부님은 상제님께서 고수부님께 정성들이신 그 성심(誠心)으로 상제님께 충성하는 한 길을 평생 걸으신 겁니다.

 

   증산상제님과 고수부님은 처음 만나실 때부터 서로 맹세로써 관계를 시작하셨습니다. 앞에 인용한 ‘수부택정공사’에 연이어진 구절입니다.

 

@ 이 때에 상제께서 문명을 써놓고 고부인에게 읽히시며 같이 읽으시니 이러하니라.

"구정만리산하우(驅情萬里山河友) 공덕천문일월처(供德天門日月妻)라."

또 조금 계시다가 읽으시기를

"명월천강심공조(明月千江心共照)요 장풍팔우기동구(長風八隅氣同軀)라.

오군합덕(吾君合德)으로 삼계개조(三界改造)니라." 하시더라. (정영규의 천지개벽경 p39)

 

   증상상제님은 또한 후천 곤도시대를 준비하는 하느님답게 후천 곤도시대를 용사(用事)하실 고수부님께 정성을 다하여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예우를 하셨습니다. 당신의 소싯적부터의 지난 행적을 일일이 다 고하시며 착하고 착하지 못한 가부를 묻고, 착하지 않은 일에 대해 하나하나 용서를 비셨습니다. 고수부님을 만난 이후 정읍 대흥리에서 보시는 공사들도 고수부님께 승낙을 얻어 하셨고,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고수부님이 먼저 하시도록 예우하셨습니다. 만물의 근원인 음양을 얘기할 때 음을 먼저 이르고 음이 바탕이 됨을, 당신께서 철저하게 실천에 옮기신 것입니다. 같이 지내시는 동안 “내가 죽으면 자네 변개하려는가.”하며 틈나는 대로 처음 맹세를 상기시키셨습니다.

 

@ 기유(1909)년 정읍 대흥리에 계실세, 고후비님 앞에 단정히 서서 절을 드리니, 고후비님은 그 연유를 몰라서 당황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으려니까, 상제께서 어려서 유시로부터 행하신 일을 말씀하시며, 그 일이 착했던가 모질던가를 일일이 물으시고 착하지 못한 일은 고후비님께 일일이 용서를 간절히 비시며, 속죄 공사를 행하시더라 하니라. (정영규의 천지개벽경 p301)

 

@ 무신(1908)년 겨울에 정읍 대흥리에서 서너 달 동안을 계시면서 여러 가지 공사를 보실세, 모든 공사를 고후비님께 말씀하여 그 가부를 문의하신 후에 승낙을 얻어서 공사로써 처결하시었다 전하니라. (정영규의 천지개벽경 p160)

 

@ 또한 진지를 잡수실 때도 고후비님께서 수저를 먼저 드시게 하시고 다음에 수저를 드시며, 담뱃대에도 불 붙여 주신 후에 담배를 피우시며, 일체 범사를 고후비님이 하신 후에 행하시더라 하니라. (정영규의 천지개벽경 p159-160)

 

   수부택정공사 이후 성심을 다하여 고수부님을 예우하셨던 증산상제님이 돌아가신 후 고수부님이 상제님 시신 위에 ‘옥황상제’라는 종이쪽지를 덮어드림으로써, 비로소 증산상제님의 상제님으로서의 위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재세 시에 천사, 법사, 선생님, 대선생님 등으로 불리우던 증산이 이때부터 ‘옥황상제’ ‘상제’라고 불리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뱀도 인표를 맞아야 용이 된다고 증산상제님이 말씀하셨듯이, 증산도 고수부님의 인정에 의해 비로소 상제의 위(位)에 정식으로 등극하신 것입니다.

 

   만에하나, 고수부님께 증산에 대한 서운함이 남아있었다면, 돌아가신 줄도 몰랐던 상제님의 시신 위에 ‘옥황상제’라 쓰인 종이쪽지를 고수부님께서 덮어드렸을까요? “상제는 무슨 상제? 과부 데려다 요로콤 내 신세를 또다시 망쳐놓고! 앞으로 어떻게 얼굴을 들고 사나. 아이고, 내 팔자야.”하시며 그 종이쪽지를 찢어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랬다면, 오늘날의 증산상제님은 없었을 것입니다. 증산을 옥황상제로 신앙하는 우리도 없었겠지요. 하지만 고수부님은 그러시지 않았습니다. 그 종이쪽지를 펴서 ‘옥황상제’라는 글귀를 보는 순간, ‘아, 이 분이 옥황상제이셨구나. 그래, 이 분 정도 되어야 옥황상제라 할 만 하지. 옥황상제가 인간으로 오셨다면 바로 이 분과 같은 인품과 행적일 수 밖에 없었을 거야.’라고 생각하시지 않았을까요? 아무 말 없이 정성껏 그 종이쪽지를 증산상제님 시신 위에 덮어드린 고수부님은 그 이후 한평생 고단한 외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신정공사를 보실 때 외에는 평범한 삶을 사신 고수부님은 평생을 꼿꼿하게 누구에게도 결코 곁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초입 신도가 잘 모르고 담뱃대를 대신 들어드릴라 치면, 담뱃대로 사정없이 때리시며 경계하셨습니다. 증상상제님이 1년 남짓 고수부님께 보여드린 정성, 그 성심의 힘으로 고수부님께서는 평생 증산을 상제님으로, 천하창생의 아버지로 받드는 외롭고 고단한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러면 고수부님의 수부로서의 위격, 어머니하느님으로서의 위격을 온전히 만들어드리는 것은 누구의 몫일까요? 그것은 오롯이 두 분 천지부모님의 도자들인 우리 태을도인들의 몫일 수 밖에 없습니다. 어머니를 증거하는 것은 어머니의 자식들의 몫이니까요. 어떻게 하면 고수부님을 온전히 어머니하느님으로 만들어드릴 수 있을까요? 아버지하느님이신 증산이 보여준 정성을 모범 삼아 고수부님을 받들고 상생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일상에서 성심을 다하여 상생을 실천하는 것, 그래서 증산의 이름을 빛내고 고수부님 이름을 빛내는 것, 이것이 우리의 할 일이고 이것이 천지부모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진정한 성사재인입니다. 우리 일은 망량의 힘으로 이루는 게 아니라 성심의 힘으로 세상 사람을 감복시켜 이루는 일입니다. 그 모범을 증산상제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고수부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 하루는 경석에게 가라사대 "망량의 힘과 성심의 힘이 서로 더불어 멀리 있지 않으니, 망량의 힘으로 사람을 복종시키고 성심의 힘으로 사람을 설복시킴이 이와 같아서 불심상관이나, 망량의 힘은 사람을 현혹되게 할 것이요, 성심의 힘은 사람을 감복시킬 것이니라." 하시었다 하니라. (정영규의 천지개벽경 p267-268)

 

@ 임인년(1902) 칠월 고부에 계실세, 김형렬이 증산상제님을 뵙고자 하여 고부로 찾아가는 길에 솥우원재 밑 송월에 이르니, 문득 형렬 앞에 상제께서 임어하시거늘, 형렬이 몹시 반가와하며 가로대 "댁으로 가신 지 수십 일이라 너무나 적조하여 찾아가는 길이올시다. 만약에 길이 어긋났으면 서로 공행할 번 했아옵니다." 하고 반겨 고하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동서로 멀리 나누어져 있을 지라도 서로의 마음이 합하여 있으면 반드시 만날 것이라. 네가 부귀와 권세를 좇음이더냐, 아니면 지극한 성경신으로 일심하여 따름이더냐. 시속에 이르기를 '망량을 사귀면 잘 된다' 하니, 이는 진귀한 물건을 구해준다 함이라. 네가 만약에 망량을 사귀려하거든 진망량을 사귀라. 그래야 참으로 잘될 것이니라." 하시더라. (정영규의 천지개벽경 pp248-249)

 

   상제님이 천지공사 보시고 고수부님이 신정공사로 감리하여 현실로 이화되는 천재일우의 지금, 진리로 인간완성을 이루고자 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심의 힘이며, 지극한 성경신으로 일심하는 것입니다. 성심으로 우리 마음 속 태을을 꽃피워 태평천하한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성심과 상생으로 만들어가는 태평천하한 세상이 곧 후천입니다.

 

@ 증산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도 문하에 혈심자 한 사람만 있으면 내 일은 이루어지느니라." 증산상제님께서 이르시기를 "세상사람들이 나의 도 문하에 '태을도인들이 나왔다'고 말들을 하면, 태평천하한 세상이 되리라."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지금은 태을도인으로 포태되는 운수이니 아동지세이니라. 그러므로 치성을 모실 때에는 관복을 벗고 헌배하라. 때가 되어 관을 쓰고 치성을 모시면 천하태평한 세상이 되리라. 나의 도 문하에 태을도를 받드는 태을도인이 되는 그날이, 그 사람의 후천인생에서 한 살이 되느니라." (이중성의 천지개벽경 p195)

 

  이상 한로치성 태을도인 도훈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 태을도(太乙道) : 태을궁 용봉서신(太乙宮 龍鳳書信)
글쓴이 : 새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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