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봉광장

[스크랩] 오성산 어진의 의의(意義)

태을세상 2016. 5. 12. 11:13


신해(1911) 920 상제님으로부터 직접 도통과 천지대권을 받으신 고수부님께서는 증산상제님의 천지공사를 일일이 확인하는 신정공사를 보셨습니다. 특히 상제님 어천이후에 처음으로 상제님을 명실상부한 옥황상제의 위격으로 천진(天眞) 그려 모시는 신정공사를 행하셨습니다.


증산상제님께서는 어천하시면서 "나는 금산사 불양답이나 차지하리라.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 미륵을 봐라." 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오신것도 금산사 미륵전을 통해서 오셨고 환궁하신것도 금산사 미륵전을 통해서 어천하셨습니다. 이것은 증산상제님이 후천의 주세불인 미륵불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그러므로 고수부님께서는 증산상제님을 옥황상제의 위격으로 천진을 그려 모신후 증산상제님을 미륵불로 맞아들이는 신정공사를 보심으로써 증산상제님이 도솔천에 계신 미륵불이심을 명확히 밝혀주셨습니다.이로써 증산상제님은 옥황상제이자 미륵불임을 천지에 공포하신 것입니다.


고수부님께서는 정묘년(1927) 9 20일에 금산사에서 치성을 올리시고 상제님의 성령이 미륵전을 떠나심을 선포하십니다. 이듬해 무진년(1928) 정삼치성에서 혼절하신 깨어나셔서 상제님의 천진을 그릴 것을 명하심으로써 금산사 미륵불에 응기해 계시던 증산상제님의 성령을 천진으로 그려 모시게 됩니다.


정묘년(1927) 구월 이십일에 고후비께서 고찬홍과 전준엽 십여 인을 거느리시고 금산사 미륵불전에 가시어 치성을 올리실 , 모든 사람들에게 이르시기를 "상제님의 성령이 이제부터 미륵전을 떠나셨느니라. 고로 상제님의 성령이 여기에 아니계심을 선포하노라." 하시더니 요강을 가져오라 하여 친히 오줌을 누우시어 이근목을 불러 세우시고 특명하여 가라사대 "너는 요강을 들고 올라가 미륵의 머리에다 오줌을 부어라."( 당시에는 미륵불 뒤로 상층까지 오르내리는 사다리가 있었음)하시고, 도중에게 가라사대 "너희들 앞으로 곳에 오지도 말지며 절도 하지 말라. 이제는 헛것이니라." 하시고 이근목에게 "빨리 실행하라." 재촉하시니, 이근목이 깜짝 놀래 벌벌 떨고 서서 감히 행하지 못하고 있으며 어찌할 바를 몰라 복지하고 있으려니까, 다시 명령하신 가라사대 "허기야 너희들이 감히 그러할 있으랴." 하시면서도 독촉이 성화같거늘, 근목이 없어 요강을 들고 엉금엉금 기어 들어가며 넘어지는 하고 미륵전 마룻바닥에 엎질러 버리니라. 이를 보신 고후비께서 석가불전에 가시더니 석가불에게 대하여 호통치시되 "그대가 어찌하여 지금껏 있는가, 빨리 가도록 하라." 하시면서 담배대로 석가불의 머리를 때리시더라. (선도신정경 PP141-142)

 

무진년(1928) 정월 초삼일 치성을 모신 후에, 고수부님께서 혼절하시어 계시다가 시간후에 일어나 앉으시어 아무 말씀도 않고 손으로 얼굴을 가르키시며 얼굴만 좌우로 두리번거리시니, 보는 이들이 답답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던 차에, 사람이 문득 말하기를 "증산상제님의 천진을 그리라 하심이오니까?" 하고 아뢰니, 고판례 수부께서 고개를 끄덕이어 응답하시고서 "천진을 그리라." 불같이 독촉하시거늘 간부들이 상의하여 사방에 문의하니 김옥현이란 화사가 그림을 그린다 하거늘, 그리하여 김옥현을 불러서 천진을 그리라하였더니 천진을 그린 솜씨가 서툴러 모실 없는 정도더라.

 그러나 고수부님께서 가라사대 " 없으니 우선 그대로 모셨다가 차차 국내의 우수한 화사를 불러 그리도록 하라." 하시기에 그대로 모시고 있다가, 그해 이월에 간부 도인들이 모여서 상의하여 알아보니, 정읍군 용북면 장군리에 사는 화사가 국내에서 유명하다 하며 이르기를 고종임금의 어진을 그렸던 화사라 하더라. 그리하여 즉시 사람을 보내어 초청하니 화사의 이름은 정산 채용신이더라.

 이로부터 화사를 목욕시켜 상제님의 천진을 그리게 , 화사가 말하기를 "어떤 모습으로 그려야 하리까." 하니, 고수부께서 재세시의 모습을 자세히 알려주시고 이러이러하게 그리라 하시거늘, 그리하여 이날부터 화사가 천진을 그리기 시작할 , 거의 그려갈 무렵에 고수부님이 천진을 그리는 방에 왕림하시어 그림을 보시고 담뱃대로 걷어 젖혀 버리니 그림이 못쓰게 되더라. 그리고는 고수부님이 나가시니 화사가 기가 막혀 말을 못하고 있음으로 간부들이 화사를 적절히 달래서 천진을 다시 그리기 시작하니라

  때에 화사가 말하기를 "어떤 모습의 기준이 있어야 것이라." 하니, 사람이 가로대 "나를 보려거든 금산사 미륵을 보라." 하였다 하니라. 이로부터 화사가 천진을 계속 그려 일이 지난 후에 거의 그려갈 무렵 고수부님이 오시더니, 바라보시고 호령하시되 "증산을 그리라 했지 누가 미륵을 그리라 했더냐." 하시며 담뱃대로 걷어 젖혀 휘두르시니 그림이 그만 못쓰게 되니라.

  일간에 온갖 정력을 들여 그려 놓은 그림을 일순에 담뱃대로 휘둘러 못쓰게 만드시기를 번이나 하시니 화사가 심히 모욕감을 느낀지라. 화를 내며 그림그리는 도구 일체를 수습하여 가지고 가려 하거늘, 간부들이 만류하여 가로대 " 어른은 보통사람이 아니시라. 신인으로서 모든 언어 행동이 범인과 같지 않으니 진정하라." 하며 간신히 만류하여 진정시키더라. 이러한 곡절을 겪으며 천진을 그리기 시작하니 고수부님이 간혹 화방에 내왕하시며 이러이러 하셨더라 하고 알려주심에 따라 그려가던 , 어느날은 의대와 관모를 어떠한 모습으로 그려야 것인지를 묻거늘, 고수부님께 여쭈니 가라사대 "재세시에는 나에게 옥황상제라 쓰신 쪽지를 주신 있으니 옥황상제의 모습으로 그리도록 하라." 하시므로, 상제님의 의대관모를 갖추어 그리며 고수부님의 감수를 받으니 방불하다 인가하시여, 이로써 천진을 완성하여 삼월 이십육일 고수부님 탄신에 봉안하고 치성을 거행한 후로 현금까지 천진을 모셔 내려오니, 통천관 위에 하도를 그린 사진이 바로 천진을 사진화한 천진으로서 현금에 전하고 진본은 고민환의 자부가 모시고 있느니라. (선도신정경 pp158-162)

 

무진년(1928) 사월 초파일 도중이 모여 치성을 드릴 , 전각문 앞에 제단을 설치하라 명하시여 그대로 전각 앞에 설단하고 상제님 천진을 단에다 모신 , 천공품(제수품) 향촉을 진설하라 하시거늘 그대로 하고 고하니, 고수부님께서 나오시어 녹사(錄士) 하여금 「금산사 불양답」이라 패에다 쓰라 하시어 팻말을 강진용의 아홉 마지기에다 세우게 하시고, 고민환에게 () 가사와 장삼을 구해다 입히시고 앞에 세우시니라.

 불서(佛書) 「천수경」을 주시며 읽게 하시고 또한 「칠성경」을 읽으라 하시면서, 가라사대 " 공사는 선천의 주불인 석가모니의 운수가 이미 되었으니 후천 용화세계 주세불이신 미륵불을 봉영하여 드리는 법을 베푸는 바니라." 하시며, 도인들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읽으라 하시더라

 "천갱생(天更生) 지갱생(地更生) 인갱생(人更生) 미륵갱생(彌勒更生)"이라 삼창하게 하시고 지극히 심고기원하라 하신 후에, 상제님 천진을 전각으로 봉안하라 명하신 도중들에게 가라사대 "미륵불 공양에 너희들의 수고가 많었느니라." 칭찬하시더라. (선도신정경p163-164) 

 



시중에 상제님 진영사진 필름으로 알려진 사진이 있습니다. 출처는 아래 링크와 같습니다.

( https://www.whoim.kr/detail.php?number=1796&thread=39r01)



상제님의 사진으로 알려진 필름과 오성산 어진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좌측의 오성산 어진과 우측의 필름을 비교해 보면 이목구비를 비롯해 용안의 윤곽까지 일치함을 있습니다. 그런데 일치하는 부분들 가운데 양쪽 위치에 있는 네개의 장신구 모양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왼쪽 오성산 어진에서 통천관에서 늘어진 줄에 달려있는 장신구의 모습이 오른쪽 필름에서도 같은 위치에 같은 모양으로 그대로 남아 있음을 있습니다. 장신구가 통천관을 오성산 어진에서는 자연스럽지만 일반 모자를 필름사진에서는 그런 모양이 있는지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결국 진영 필름은 오성산 어진을 바탕으로 의관부분을 일상복으로 수정해 그린 것을 필름화 것으로 볼때 설명이 가능하겠습니다.


 증산상제님께서는 자신의 참모습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온전치 못한 증산상제님 영정을 그려놓고 신앙하는 모습을 다음과 지적하셨습니다.


 @ (증산상제님께서) 연이어 땅에다 발을 내추시더니 "아차, 나는 무엇이라." 하시고 신을 고쳐 신으시고 "나의 일은 걸음 발자욱도 하늘에서 숭내를 내는 법인데 조금도 어김이 없나니 하늘을 보라." 하시기로, 하늘을 쳐다보니 구름이 선생님같이 생겼는데 발을 내려셨다가 들어올리는 형상이 완연히 보이는지라. 형렬과 자현이 허리를 꾸부려서 청천을 바라보고 절을 하니, 선생이 보시고 가라사대 "나를 옆에 두고 구름을 보고 절을 하느냐. 뒤에 나의 코도 보지 못한 사람이 나의 모양을 만들어놓고 얼마나 절을 할지. 나를 자는 날같지 않으면 절을 하지 않치마는, 나를 못본 사람은 나의 모양이라 하야 얼마나 절을 할난가 알지 못할 일이로다." 하시고, 가라사대 "형렬이 구름을 보고 절하는 같으니라. 네가 오늘 도수를 첬다. 공사를 넘겼다. 나를 옆에 두고 구름을 보고 나라고 절을 했으니 네가 생각해보아도 우숩지야. 일이 참으로 신통한 공사라고 생각하니 부끄러워 말라. 너의 마음으로 일이 아니어든 어찌 그리 부끄러워하는고." 하시니라. (동곡비서 pp62-63)


 나라에도 관공서마다 걸어놓는 대통령의 표준 사진이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조상님의 표준 사진이나 초상화가 있습니다. 또한 나라에 공을 세운 역사적인 인물들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자료와 증언을 통해 표준영정을 제작하여 기념합니다.


 오성산에 모신 증산상제님 영정은 고수부님이 친히 감수하시고 삼계에 선포하신 표준영정으로서, 이마두신부 이하 조화정부 대신명들에 의해 보호받는 표준 영정입니다.

 

 물론 오성산 어진을 제외한 다른 교단의 어진도 나름대로 과도적으로 의미는 있겠지만,증산상제님과 고수부님이 인가하시어 조화정부에서 결정된 공식어진은 아닙니다.

 

  나라의 근간이 되는 공무원은 관공서에 대통령의 표준사진을 걸어놓고 근무하듯이, 증산상제님과 고수부님의 뜻을 올바로 받들고자 하는 증산신앙인들은, 오성산 어진을 모셔놓고 치성을 모시고 또한 수행하고 포교하는 것이 좋습니다.

 


출처 : 태을도(太乙道) : 태을궁 용봉서신(太乙宮 龍鳳書信)
글쓴이 : 충정(忠正)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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