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봉광장
[스크랩] 신앙의 길이 영적노동(勞動)이 되어서야.....
태을세상
2017. 3. 9. 01:23
어떤 스님이 암자에서 공부를 하는데 아침이면 물 긷고 낮엔 나무하고 저녁이면 군불 지펴
밥을 짖고 그렇게 3년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어느날 나무를 하다가 문득 깨달았다는 소문을 듣고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서 봤더니 그 스님 여전히 물 긷고 나무하고 밥 짖고 똑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 겁니다.사람들이 물었죠 도대체 뭘 깨달았느냐 는 물음에 스님의 답이 이랬습니다.전엔 하지 않의면 안 되는 일을 억지로 했고 지금은 즐거워서 한다.
무슨일을 하더라도 그 일을 내가 주체적의로 하느냐,그 일에 끌려 다니느냐에 따라서 마음자세가 틀려지고 행동거지가 다르게 나타나게 됩니다.
특히 종교의 영역은 숭배의 대상을 현상화( 자신의 세계관에 신앙대상을 그려놓음 )시켜서 자신의 믿음속에 신앙의 절대성을 가지므로 내세에 안녕을 기대하거나 현세에 복을 바라는 주종관계로 획일화 됨의로서 자신도 모르게 신앙 대상자와 자신의 관계가 종속적인 신앙 형태로 나타나게 되므로 계율에 억매이고 신앙적 양심에 구속되여 주체적 신앙관이 서질 않게 되는 것 입니다.그렇다고 주체성이 지나치면은 독선과 방종의로 흐를수 있고,계율과 신앙적 양심에 너무 치우치면은 경직된 신앙관을 같게 됩니다.세상사도 그러하지만 불가근 불가원( 不可近 不可遠 )의 자기중심이 바로 서 있어야,신앙의 기준이 명료 해져 질적신앙을 할 수 있습니다.신앙은 진리를 궁구(窮究)하는 행위 입니다.진리가 너희를 자유럽게 하리라 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여다 보면은 한마디로 너희도 진리적 인간이니 진리의 주체성을 가져라 이겁니다.스님이 물 긷고 나무하고 저녁이면 군불 지펴 밥 짖는 줄거움의 깨달음 이라는 것은 내가 생활에 이끌려 다니느냐 내가 생활을 주체적의로 이끄야에 차이 입니다.생활이 진리이고 진리가 생활이며 삶 그 자체인 것 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생명(生命)의 영원성과 자유성을 찾는데 있습니다.
한 종도가 상제님 수명을 여쭈니,나는 천지일월과 함께 동행 하노라,하시는 시공간의 구애 를 받지 안는 진정한 자유인 임을 밝혀 주신 바가 있습니다.
그러하듯 인간은 누구나가 상제님과 같은 영원한 자유인 이며 진리적 존재이며 진리의 주체인 것 입니다.
나에 종복이 되지말고 어진 벗이 되라,네 심중(心中)에 직통하는 길이 있음을 깨달으라,하신 말씀 또한 너희 도 진리의 주체로서 영원한 자유를 찾으라 는 뜻이 담겨있지 않나 생각을 해 봅니다.
어떤 종교를 믿든 신앙 그 자체는 신성하고 성스러운 것 입니다.신앙의 궁극의 목적은 생명의로 귀결 되기 때문입니다.진리 자체가 생명이고,생명(生命)은 진리의 호흡이고 주체이기에,신앙의 길은 마음을 잘 닦아서 영적인 성숙을 이루어야 합니다.그져 열심히 잘 믿고 잘 따르면,하늘이 지도자가 보상을 해 주겠지 하는 밑도끝도 없는 도통과 대두목신앙 천주신앙의 허망한 신앙의 영적노동(勞動)이 되어서 는 안됩니다.
육신과 영혼이 고달픈 영적 노동신앙을 벗어나 깨우침의 길로 가야 많이,진리의 주체로서 영원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현무경에 천지지 중앙은 심야라 고 로 동서남북 신의어심 이라(天地之 中央 心也 故 東西南北身依於心)했습니다.천지의 중심이 마음이고,말없는 천지의 생명력도 마음에서 비롯 된다는 것 을 알수 있습니다.그러기에 마음이 중요하고 마음닦음이 절실 한 것 입니다.나를 구속 하는 것도 마음이요,나를 자유럽게 하는 것도 마음 입니다.마음이 조화요,마음이 낭패 입니다.
태을도(太乙道)의 길은 마음을 잘 닦아 상극(相克)을 극복하고 상생(相生)의 인생의로 재 갱신 돼서 영원한 자유의 길을 가라는 것 입니다.
출처 : 태을도(太乙道) 대시국(大時國)
글쓴이 : 저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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