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수원법소 상강치성 도훈 "유불선의 한계를 알아야"
수원법소 상강치성 도훈 "유불선의 한계를 알아야"
2016년 10월 23일 (음력 9월 23일)
오늘은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입니다. 어제부터 집에 보일러가 돌아가는 것이 눈에 띄더라구요. 그리고 오늘은 어머니와 통화하며 김장 일정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이야기를 나누었더랬습니다. 어느새 겨울이 다가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작년 동지 이후로 지방법소에서 도훈을 시작한지가 거의 1년이 다 되어가고 있습니다. 일년이 다되었지만 지금도 아직 제 목소리로 녹음을 해서 녹취를 한다는게 참 낯설기도 하고 그런 부분이 항상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집사람이 초등학교 교사인데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학교에서 공개수업을 준비하느라고 자기가 수업하는 모습을 촬영을 해서 자기가 들어보니까 내 목소리가 이런가, 내가 수업하는 모습이 이랬었나 싶은게 자기가 혼자서 상상하던 모습과 너무나 다르더라는 거죠. 그래서 그 이야기를 옆반 선생님한테 이야기를 했답니다. 그랬더니 그 선생님 말씀이 “참 선생님은 용감하다, 어떻게 자기가 한 수업을 녹음해 들어볼 생각을 다하느냐.” 그런 말을 하더랍니다. 그 말이 한편으로 위로가 되더라구요. 항상 어설프지만 오늘도 또 도훈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제가 공대 출신인데 대학 때 전공공부를 할때는 교수님이 나라에서 최고의 전문가같고 최고로 보이셨는데 제가 전공을 살려 회사에 취직을 하고 보니까 사실 업계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학계의 그런 부분보다도 현실속에서 사업적인 영역이 더 핵심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구요. 학생때는 그 교수님이 유학도 다녀오시고 훌륭해 보이시고 배우는 입장에서 그런 것을 더 대단하게 보고 추앙하게 되지만 결국 더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부분은 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현실적인 토대 위에서 그런 학문적인 부분도 필요하고 실제로 현실에 도움이 될 때 학문도 가치를 가지게 되고 인정받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떤 진리의 길, 신앙의 길을 가면서도 자칫 어떤 지적유희이 자아만족으로 흐르기 쉬운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고담준론과 참신하고 대단해 보이는 수많은 말과 글을 만들어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지적인 만족감을 주기도 합니다만 자칫 현실과 동떨어져서 거품낀 지적유희나 관념적 자아만족으로 스스로를 높여가게 되고 오만하게 흐르기 쉽습니다. 진리의 길은 삶의 길 자체이어야 합니다. 삶을 위해 학문을 만든 것이고 삶을 위해 진리를 밝히려는 것이지 진리와 학문을 위한 삶을 추구하다 보면 자꾸 스스로 자존자대해지고 높아져 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태을도에서 한결같이 이야기하는 핵심적인 내용은 종통이나 진리적인 지식보다도 마음닦고 태을주를 읽어서 내 마음을 바꿔서 내 말과 행실을 바꾸어 현실속의 삶을 바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후천은 인간이 삼계를 주재하는 인존시대이기 때문에 결국 사람이 그런 권능과 진리의 주도권을 가지고 삼계를 다스리려면 거기에 합당한 마음과 말과 행실이 준비가 되어져야만 하는 것이지요.
선천에 유교에서 이야기 했던 부분은 양심을 지키면 된다, 양심을 회복하면 된다, 인의예지 사단에 맞게 행동하면 된다, 때로는 어질게, 때로는 예의에 맞게, 때로는 의의 정신으로 응징할 것은 응징하고, 분노할 것이 있으면 분노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진리에 맞는 행동이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양심에 맞게 행동을 잘 하기만 하면 모두가 그렇게 교화해가 모두의 행실이 그렇게 철저해 지기만 하면 이상세계가 된다하는 그런 가르침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옳은 말씀이고 진리적으로 맞는 이야기이고 마음을 닦아 천심과 양심을 회복하라는 상제님의 말씀과도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그 방향성에 있어서 차이가 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현실속에서 아무리 나름대로 착하게 살아도, 얌전하게 살아도, 양심껏 살아도 부딪힐 일이 생깁니다. 내가 내 마음을 편안히 가져서 절도에 맞는 행동을 하면 탈이 없을 것 같지만 현실인 여건들 속에서 밥벌이를 하며 살아가다 보면 내가 열 번 잘하다가도 한순간 방심을 해서 말실수를 할 수도 있고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남을 배려를 못해 오해를 사는 경우도 생깁니다. 모든 사람들이 양심을 지키려 하다가도 본의 아니게 여건상 실수를 해서 피해를 주는 경우가 생길 수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양심만 회복하고 양심에 맞게만 살면 좋은 세상이 될 것 같지만 상극이 만연한 이 세상에서는 그것자체가 불가능한 현실인 것이지요.
상제님의 가르침은 어떻게 보면 개인적인 양심도 회복을 해야 하겠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남의 잘못도 이해하고 용서하고 포용하라는 것입니다. 이해하고 용서하고 포용하는 마음이 없으면 결국 나의 양심에 떳떳하다는 이유로, 나의 옳음이 자명하다는 이유로 의를 앞세워서 남들과의 부딪힘을 초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를들어 내가 공부를 해본 결과 돈오돈수가 틀리고 돈오점수가 맞더라도 돈오돈수가 틀리다며 돈오돈수 계열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하면 결국 생각의 차이로 부딪히며 척과 살을 짓고 분란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상제님은 일에 큰 지장이 없으면 항상 좋게 붙여서 이야기 하라고 말씀을 하시거든요. 틀려도 스스로 틀린걸 알고 고칠 수도 있고 지적해 주더라도 거슬리지 않게 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자신의 확신을 바탕으로 말을 앞세우고 말의 성찬을 꾸미다 보면 결국 스스로의 말의 덫에 걸려 척과 살을 짓고 맙니다.
상제님 말씀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 혹자가 묻기를 "노자는 덕으로써 원한을 갚으라하고 공자는 곧음으로써 굽음(잘못,허물)을 갚으라 하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씀하시기를 "덕으로써 원한을 갚으면 원한이 능히 덕으로 바뀔수가 있고, 곧음(옳음)으로 굽음(잘못)을 갚으면 원한에서 원한이 생기나니 세상을 멸망시킬 위험한 말이니라. (이중성의 천지개벽경 P131)
@ 제자가 묻기를 " 다른 사람이 잘못을 범하기를 두번 세번 반복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씀하시기를 "힘써 용서하라. 잘못은 그 사람에게 있거니와 너에게는 한량없는 덕이 되느니라." (이중성의 천지개벽경 P132)
상제님은 항상 용서를 주장하셨습니다. 예수가 누가 나의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대 주라고 하셨듯이 상제님은 누가 나를 돌로 치면 떡으로 돌려주라고 하셨습니다. 자신과 제자들을 힐난하고 모욕하는 모습에 맞서려는 제자들을 불러세우시며 꾸짖으시며 그 사람들을 고맙게 생각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유튜브에 보면 선천의 유불선의 가르침들을 인용하면서 양심을 회복하고 인의예지 사단에 맞게 자기 행동을 분석해서 실천하며 때론 비판할 건 비판해야 한다고 하며 사람들이 그 양심만 회복하고 실천하면 된다, 이미 유불선에 모든 해답은 다 있다, 유불선으로 충분하다며 양심회복운동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것은 비유를 하자면 모든 사람이 교통신호를 어기지 않고 교통신호만 잘 지키면 사고가 날 일이 없다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우리가 운전을 하면서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할때가 있습니다. 다른 걱정에 정신이 팔려 신호를 못보기도 하고 너무 졸려 깜박할 때도 있습니다. 사정이 급해서 과속을 해야만 할때도 있을 것이고 졸려도 할 수 없이 참고 가야 할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상제님의 말씀은 어떻게 보면 신호를 잘 지켜야 하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으니 너희들이 항상 방어운전을 하라는 것입니다. 상대가 실수할 여지를 감안을 하고 운전을 하는 것이지요. 상대가 무조건 신호를 지키리라 생각하고 내달리면 결국 사고가 생깁니다. 상제님께서는 항상 인간의 인간적인 실수들을 감안하고 용서하고 포용하고 이해를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모든 사람이 신호를 지키면 사고가 없겠지만 그것은 어떻게 보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일 수가 있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방어운전을 하라는 것은 아주 현실적인 실천가능한 설루션이 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를 다 처결하고 내가 떠나리라 하시면서 공자 석가 노자의 유불선 성인들을 불러 앉히시고 꾸짖으십니다.
공자를 보고는 “그대가 무슨 성인인가. 말로는 삼강오륜을 밝히고 예의범절을 밝히는 도덕군자라 해 놓고, 삼대에 그대가 먼저 출처를 하였으니 그러면 그 중생의 원억을 어찌할까. 그러고도 성인이라 할까. 저리 물리쳐라.”하십니다.
진리적으로는 옳음을 밝히고 말로는 옳은 말을 했지만 결국 공자께서도 실천에 있어서는 부족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공자님의 부족함이라기 보다도 사회적 여건이 그럴 수 밖에 없는 상극의 세상이었던 것이지요. 상제님도 어려서부터 자신이 잘못한 것들을 하나씩 조모조목 고수부님께 용서해 주기를 비셨습니다. 상제님도 공자도 우리도 현실속에서 인간의 몸을 가지고 살면서 실수를 할 수가 있습니다. 옳은 말과 가르침을 말하기는 오히려 쉬워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행실을 완성한다는 것은 상극이 만연한 현실속에서 지나치게 이상적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상제님께서는 항상 남의 단점을 보지말고 장점을 보라고 말씀을 하셨고 부족한 것을 들춰내지 말고 언덕을 베풀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선천 유불선의 가르침으로서는 평온한 세상이 완성이 될 수가 없다는 그런 말씀을 명확하게 하셨고 그 대안으로 결국은 용서하고 포용하고 사랑하라는 그런 삶의 처세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지 않았나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상제님께서 유불선의 공자 예수 석가를 불러 앉히시고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들어라. 너희들이 인간으로서의 대우는 상(上)대우를 받을 만 하나, 자네들 도덕을 가지고는 포덕천하와 광제창생할 수 있는 가치는 못 된다는 말일세. 앞으로 나의 도덕이 세상에 나오거든 모두 자네들이 그 도덕안에서 잘 살도록 하소. 자네들의 도덕이 전혀 못쓴다는 말은 아니로세. 나의 말이 옳은가. 옳으면 옳다고 대답하소.”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내가 내 양심에 떳떳하다고 내 진리적 앎이 스스로 자명하다고 그 옳음을 내세워서 남의 잘못을 탓하고 비난해서는 결코 세상이 안정될 수가 없습니다. 내 스스로 양심에 충실하게 살면서 그것을 기본으로 남들의 잘못이나 부족한 점을 항상 용서하고 이해하고 포용하는 그런 태도를 가져야만이 세상을 안정시킬 수가 있고 사람들을 감동시켜서 이끌어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신호를 지키는 것을 넘어서 방어운전으로서 세상에 척과 살을 우리의 마음으로 풀어 내면서 용서해서 화평한 그런 세상을 만들어가는 상극세상의 버퍼가 되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상으로 상강치성 도훈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