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수원법소 대서치성 도훈 “천지의 화육에 동참하는 삶 “
수원법소 대서치성 도훈 “천지의 화육에 동참하는 삶 “
2016년 7월 22일 (음력 6월 19일)
오늘이 대서인데 대서 더위의 기세가 대단한 것 같습니다. 더운데 멀리서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지난 주에 티브이를 보다 보니까 ‘한국인의 밥상’이라는 프로에서, 제가 즐겨보는 프로인데, 보부상 밥상이 나오더라구요. 경북 울진에서 태백산맥 12고개를 구비구비 넘어 봉화의 춘양장터라는 유명한 장터가 있는데, 제가 어릴때 아버지께 춘양장터를 많이 듣곤했었는데, 90세가 넘은 울진의 마지막 남은 보부상으로부터 최불암씨가 이야기를 듣고 전해 주더라구요.
이 할아버지가 보부상을 하게 된게 울진 바닷가에서 고기잡아서는 10식구가 감당이 안되니까 보부상으로 나선거지요. 울진 바닷가에서 나는 소금과 고등어를 잡아서 그걸 지고서 태백산맥 열두고개 십이령 고개를 넘어서 봉화 영주로 팔러 나서는 거지요. 봉화 영주는 내륙이다 보니까 남쪽으로도 서쪽으로도 바다하고 머니까 해산물 구경하기가 힘들다 보니까 동해안에서 해산물을 가져오면 좋은 가격을 받겠지요. 그때는 후라시도 없이 그믐에는 깜깜한 밤길을 더듬고 다녔고, 멧돼지를 만나 고생하기도 하고 도적이 나오기도 하는 길을 그렇게 다녔다고 합니다. 점심먹고 130리길을 걸었다고 합니다. 52킬로를 걸은 거죠. 먹고 살기 위해 그렇게 했지만 그때는 사는게 사람 사는게 아니었다 하는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어제 뉴스를 보니 봉화에서 울진가는 국도가 확장개통해서 이제는 20분이면 간다는 겁니다.
또 티브이에서 굿네이버스인가 하는 프로를 보니까 아프리카의 불우한 사정을 전해주더라구요. 젊은 엄마가 흙집에서 살며 어린 애들 셋을 키우는데 가축도둑들이 쳐 들어와서 남편을 죽여서 혼자 애들을 키워야 하는데 먹을게 없어서 남의 일을 해 주고 먹을 것을 얻어와야 하니 집에서 애들 셋이가 남아서 어디 풀을 뜯어와서는 물도 맑은 물이 없어서 흙탕물을 부어서 풀을 끓여서는 그걸로 배를 채웁니다. 그러다가 한번은 제일 어린애는 배가 고프니까 뜨거운 줄도 모르고 그 풀 끓이는 냄비에 달려들었다가 온통 화상을 입어 피부가 다 벗어지고 곪아 파리가 꼬이는데 병원도 가질 못합니다. 맏이는 자기 때문에 동생이 그렇게 되었다고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그걸 보면서 속에서 뭐가 치밀어 오르면서 내가 저 상황이었다면 내가 어떻게 할까 생각을 해 보게 되더라구요. 먹을게 없으니까 농사를 지어야 할건데 농사 지을 줄을 모르면 농사법를 가르쳐야 하고 풍토에 맞는 종자를 어디서 구해와야 할테고 아니면 개발을 해야 할테고 가물어서 농사가 안되면 관정을 박아서 지하수를 끌어 올리든지 수로를 만들어 물을 끌어 오든지 방안을 찾아야 할테고, 이런 것들이 개인차원에서 못한다 하면 국가가 나서지 뭔가 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는데 나라가 정치적으로 불안정해서 이도저도 추진이 안된다면 아마 혁명이라도 했겠다 싶은 생각이 들겠더라구요. 가족들이 굶어 죽어나가는데.
저희 어머니께서도 평생 농사를 지으시면서 살아오셨는데 지난주에 여동생 가족과 괌에 해외여행을 다녀오신 어머니와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어머니께서 우리때도 농사를 지어도 저렇게 먹을것도 없고 했었는데 어느때 부터인가 동사무소에서 스피커로 동네에 방송을 하더라는 거죠. 농사철에 맞춰서 방송을 해서 언제 뭘 심어라 언제 무슨 약을 쳐라 등등 이런 것들을 일일이 다 가르쳐 주더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체계적으로 농사를 짓게 되고 농민들이 많이 깨이고 농사도 잘짓게 되었다는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우리가 도의 길을 가면서 대인공부라고 하기도 하고 성인의 심법을 닦는다고 말을 합니다. 상제님께서는 그런 말씀을 하시거든요. 우리 공부는 대인공부이고 대인은 천지의 화육에 동참하는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시거든요. 화육. 화라는 것은 변화시켜 발전하게 하는 것이고 육이라는 것은 기르고 키우는 거죠.
우리가 흔히 우주의 마음, 우주정신이라는 것을 어려운 말로 건곤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쉽게 말하면 건의 정신이라는 것은 변화 발전하려는 마음인 것이죠. 정체되어 있지 않고 계속 변화하고 진화해 가려는 우주의 마음이 건으로 표현 된 것이지요. 곤이라는 것은 항상 안정되게 영원하게 존재하려는 마음을 말합니다. 모든 변화에는 위험이 따릅니다. 존재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건과 곤이라는 상반되는 우주의 마음, 이런 변화와 존속이라는 상반되는 우주정신이 생명현상이라는 모습으로 현실세계속에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생명을 낳고 이어져가는 그런 과정이 바로 도의 과정이기에 생생지위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우주의 마음을 닮은 인간의 마음이고 그 마음을 어렵게도 표현하기도 합니다만 결국은 하루 세끼 밥벌어 먹으면서 변화하고 발전해가는 삶의 모습에 다름이 아닙니다. 생명을 살리고 사람을 법먹여주고 변화하고 발전하게 해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게 돕는 사람이야 말로 천지의 마음을 인간의 몸으로 실천해 내는, 천지의 화육에 동참하는 진정한 대인이자 성인이겠다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상제님께서도 “의식색 연후에 천지기운을 받는다”고 하셨듯이 기본적으로 의식주가 해결 되어야 인간의 무한한 가치와 잠재력이 발현되어 질 수 있는 것이거든요.
서전서문에도 나오듯이 마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늘로부터 받아 나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서전서문에 “예악교화는 심지발야요 전장문물은 심지저야요 가제국치이천하평은 심지추야니 심지덕이 기성의호인저.” 예의범절과 음악으로 세상을 가르쳐 자연스레 변화시켜가는 것은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고 온갖 경전과 책과 문화와 문물들도 마음이 지은 것이요 가정을 꾸리고 나라를 다스려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것 또한 마음의 확장이니 이 마음의 덕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가 하는 말씀이지요.
봉화에서 울진으로 그렇게 고생스럽게 다니던 길이 어제 2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그렇게 고되게 살던 삶에서 해방되어 생의 즐거움을 누리고 새로운 가능성과 변화발전을 시도해 볼 수 있는 시간이 생긴것은 어떻게 보면 현대 기술문명의 덕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증산상제님께서도 기술로써 서양사람들이 성인의 일을 대신하게 하신다고 하셨듯이 기술로써 사람들의 삶을 개선시켜 화육에 동참하는 것이지요.
대부분 사람들인 이마두 신부님을 그저 선교사로의 역할 정도로만 알고 있지만 상제님이 밝혀주신바에 따르면 그 이마두신부님이 사후에도 인간세상을 지상천국으로 만들기 위해 그 뜻을 펴기위해 신명계의 벽을을 허물고 동양의 문명신을 이끌고 서양으로가 서양사람들에게 알음귀를 열어주어 현대 과학기술문명을 태동하게 해서 지금의 이 편리하고 풍요로운 세상을 만들었지만 또한 그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신농씨 이전의 삶은 수렵채취의 방식이었겠지요. 신농씨가 직접 농사를 짓는 법을 창안하고 온갖 식물들을 맛보아서 먹을 것 못 먹을것을 가려서 먹을거리들을 늘리고 병에 맞는 약초들을 찾아내서 사람들의 의식주를 해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 분인 것이지요.
아까 아프리카 이야기 하면서 말했듯이 약육강식의 시대에 도적들이 남의 것을 다 빼앗고 하잖아요. 국가라는 틀이 잡혀야 치안이 서고 삶이 안정이 되는 것이거든요. 강태공은 육도삼략의 국가운영 바이블을 통해 민생과 정치를 안정시키는 심법과 술수를 창안을 해 내신거지요.
천지개벽경에 의하면 증산상제님의 전생이 신농씨와 강태공이라는 것이지요. 인류를 번성하고하고 발전하게 하는데 이런 핵심적인 역할을 하신 신농씨와 강태공으로서의 삶의 공덕으로 증산상제님이 옥황상제로 추대가 되셨다는 것이지요. 이마두 신부님도 신명계의 주벽이 되셨잖아요.
우리가 흔히 유불선의 성인들을 많이 말을 하지 않습니까? 유불선성인들이 학자적이고 종교적이었다면 신농 태공 이마두신부님의 역할은 실질적이고 현실적이었던 거지요. 신농의 이름이 약방에 단지 신농유업이라는 정도로 남고 강태공의 이름이 디딜방아에 태공조작이라는 정도로 남고 낚시꾼을 일컽는 말정도로 쓰여집니다.
요즘에야 작은 기술하나 디자인하나 컨텐츠 하나 신약하나 개발해서도 저작권 특허권을 얻고 독점적 지위로 그 댓가를 받는 세상인데 그 옛날 그 농사법을 개발해 퍼뜨리고 먹을 것 못먹을 것을 가려 먹을거리를 늘리고 병에 맞는 약을 찾아 생명을 살리는 그 신농의 그 큰 은덕, 그러고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그 은덕이 음덕이 되어 후천을 여는 옥황상제가 되신것이라 생각됩니다.
유불선의 성인들이 나름대로 하늘의 뜻과 하늘의 마음을 읽어서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그 형이상학적 심리적 공부와 논리와 고매한 말씀을 통해 사람들을 교화를 해 오신 공이 있어 천추 만대에 존경과 추앙을 받아온 반면에 그보다 더 근본적이고 더 현실적이고 더 핵심적인 역할들을 하셨으면서도 알려지지 않았던 강증산상제님과 이마두신부님이 후천의 요순임금으로서 역할을 맡게 되신것이지요.
그래서 증산상제님을 따르는 우리들은 나를 내세우고 나를 드러내고 내가 주목받으려는 그런 마음이 아니라, 선천의 유명한 성인들처럼 고상해지고 대단해지려는 모습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아도 현실속에서 세상을 위해 도움이 되는 그런 삶을 살아가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크게 보상받지 못하더라도 직장일에 충실하는 것이 국가와 인류를 위해 도움이 되는 삶인 것이고 선한 말과 행동으로 주위에 위안을 주고 온화한 모습으로 동요를 잠재우고 진중한 모습으로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나가는 것이 티나지 않는 모습이지만 이런 것이야 말로 후천을 열어가는 지도자의 모습이 아니겠는가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선천의 성인들의 교화가 실패한 측면이 있습니다. 학문의 시조, 종교의 시조가 어려운 이야기, 대단한 이야기, 존경스러운 이야기로 거창하게 시작할 수록 그 제자들은 그 교주처럼 대단해지려 하고 존경받으려 하고 그 스승처럼 더 어려운 이야기를 하려하고 더 존경스러운 이야기를 하려고 하다 보면 이게 결국은 중심을 잃고 현학적이고 지엽적이고 복잡한 가르침으로 변질되고 마는 것이 거든요.
개콘에 보면 노래를 하는데 처음 노래 하는 사람보다 점점 더 고음으로 불러가다 보면 어느 순간 감당을 못해서 삑사리가 나잖아요. 교주가 잘난척하고 똑똑한척 하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인간상이 어떤 모습이 되겠어요. 모든 사람들이 다 잘난척 똑똑한척 자신을 내세우려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이겠어요?
그래서 선천은 갈수록 어지러워지고 후천은 갈수록 다스려진다고 상제님께서 말씀을 하시거든요. 생명이라는 근본에서 멀어져 나를 높여가고 분화되어가 지엽적인데 매몰되니 중심을 잃고 어지러워 지는 것이고 후천은 나를 낮춰가고 생명의 근본을 잊지 않고 범사에 감사하기에 점점 가닥이 잡혀가고 수렴되어 가고 안정되어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상제님께서는 그렇게 말씀을 하시잖아요. 말할때는 어눌한듯 말하라. 일에 처해서는 어리석은 듯이 처세하라. 그래야 나도 상대도 편안해 지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속성을 알면 그럴 수 밖에 없겠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하느님이신 증산상제님이나 고수부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살아가신 모습도 자기를 높여가는 길이 아니라 자신을 낮춰가는 모습이셨습니다. 대단해 보이는 가르침으로 내가 존경받는 모양세가 아니라 내가 남들을 존중하고 존경하는 모습이어야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우리가 보는 단주수명자의 모습이 그렇듯이 우리 태을도인들의 모습도 낮아지는 그런 모습으로 삶을 살아가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태을도를 펴면서 때로는 영웅의 수완을 발휘를 해야 할때가 있겠지만 항상 그 근본적인 마음가짐과 태도에 있어서는 그 근본을 잊지 않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 도훈을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