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봉광장

[스크랩]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2)

태을세상 2016. 1. 1. 14:25

 오랫만에 본 글을 씁니다.

 

 첫 애를 가지고 4, 5개월쯤 되었을 때,  총천연색으로 신기한 꿈을 꾼 적이 있습니다. 살짝 옴니버스 형식으로 세 장면이 연결되어있어 그 당시엔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태몽이었습니다. 아이 셋을 낳은 후, 그 꿈이 아이가 셋이라는 것과 성별까지 일러주었다는 생각에 신기해 했었습니다. 아이 셋이 성장해서 첫째가 대입 시험을 보러간 날 꿈속 장면과 흡사한 상황을 경험하고 고3 올라가는 둘째의 장래희망을 들으며, 내 꿈이 아이들의 숫자와 성별만이 아니라 아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미래까지 어느 정도 보여준 걸 알고는 얼마나 마음속으로 깜짝 놀랐는지요. 전 대부분 기억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개꿈을 주로 꾸는, 영험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이 꿈은 제게 많은 걸 생각하게 했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입체적 공간을 3차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현실적 공간은 특정시간과 결합되어 존재하므로 흔히 시공간(時空間)이라 표현하지요. 3차원 입체공간에 시간이라는 또다른 차원이 결합되어있으니, 4차원이라 불러야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이 시공간을 4차원이라 부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공간은 위아래 전후 좌우 이동이 가능하지만, 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미래방향으로만 진행할 뿐 이동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걸 시간의 불가역성(不可逆性)이라고 하지요. 그러면 현재에 있는 제가 어떻게 꿈속에서 아이들의 미래의 시간을 볼 수 있었던 걸까요. 그 아이들의 미래의 시간을 미리 당겨서 본 것일까요, 아님 제가 그 아이들 미래에 살짝 다녀온 것일까요. 전 시간은 순환지리로 진행하는 것이며, 나선형으로 진행되는 시간의 한 지점(꿈을 꾼 시점)에서 다시 그 지점으로 순환해오는 미래의 어떤 시간대(아이들의 미래)를 웜홀같이 순간적으로 관통해 들여다본 거라 결론내렸습니다. 아, 이런 식으로 미래를 들여다보는 거구나 했던, 그 때의 깨달음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제가 꾼 태몽의 경우는 미래의 시점이 어느 정도 가까워서 꿈을 꿨던 제가 현실에서 실제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경우였습니다. 이런 경우야 개인적으로 시비를 판단할 수 있지만, 역(易)에 나오는 '선천 오만 년 후천 오만 년'이나 증산상제님께서 말씀하신 선천 말의 '급살병'정도 되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우리의 100년이 채 못되는 수명으로 '오만 년'을 검증할 수도 없고, 더군다나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급살병'은 상상하기조차 힘듭니다. 게다가 서양문물에 기반한 학교교육까지 받은 상태에서 하느님이 이 땅에 다녀가셨다니요! 그런데 그 하느님이 그토록 무서운 급살병에 살아남는 무기(법방)로 주신 것이 기껏 '마음 닦고 태을주 수행'이랍니다. 너무나 보잘 것 없어 신빙성이 떨어지는지, 태을도에서 주장하는 '마음 닦고 태을주 수행'을 법방이 될 수 없다 무시하는 곳에서는 의통인패나 해인이라고 하여 '도장(印)'을 내세우기도 합니다.

 

 이런 얘기들이 처음에는 학교교육에서는 듣도보도 못한 파천황의 얘기라 규모에 놀랐다가, 살짝 의심도 했다가, 하지만 모두가 예외없이 죽는다는 얘기에 무엇보다 내가 신앙하면 부모를 비롯한 가족이 살고 집안의 조상까지 다 산다는 말에 마냥 외면하기도 그렇고 또 이런 쪽으로 원래 관심도 있었기에, 일단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한 번 받아들이게 되면 그 다음 얘기들도 계속 받아들이게 되고 나중에는 그 단체의 주장이 바로 내 신념이 되어 열성적으로 신앙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어느날 우연히도 내부의 심각한 비리를 알게 되면 처음엔 완강히 부정하다가 비리의 증거가 계속 추가되면서 그동안 무오류의 신성성으로 경배해오던 지도자상이 일시에 무너지게 됩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애초의 신앙의 출발점이던 증산상제님에 대한 믿음까지 이 과정에서 통채로 흔들려져서, 그 단체를 떠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증산신앙 자체를 접어버리는 것에 있습니다.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단체에 속해 활동하던 간부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어느 순간엔가 상제님보다 지도자가 신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져버려 지도자가 아니면 증산도 아니게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검증불가한 내용으로 교리가 잡혀있기에, 한 번 의심이 시작되면 걷잡을 수가 없게 됩니다.

 

 이런 분들은 대부분 신앙을 함에 있어 신앙의 토대인 진리의 속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채워놓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자신도 모르게 신앙단체의 건물의 규모에, 신도들 숫자에, 지도자의 위엄에 기대어 신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기대어 안주하며 신앙해왔던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 더이상 신뢰할 수 없을 때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붙들고 계속 믿어보라 하면 믿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진리를 대하는, 신앙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는 아닙니다. 진리라는 것은 보이는 존재들을 일이관지하게 관통하는 섭리, 이치 같은 것입니다. 보이는 것 같지만, 보이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보이는 존재들 이면에서 엄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가시(可視)거리, 가시(可視)광선, 가청(可聽)영역, 이런 말들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영역이 참으로 한정적이어서 극히 일부분만 보고 듣고 느끼는 지를 알게 합니다. 물질적으로 엄연히 존재하나 우리가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부분이 훨씬 방대합니다. 물질계만 놓고 봐도 이러할 진대, 그 물질계 이면에 존재하는 이치, 법칙까지 생각의 범위를 넓히면, 세상은 인간이 자신의 경험만으로 단정짓기엔 너무나 넓은 곳이 되어버립니다. 증산의 진리는 물질계, 이면의 법칙, 그리고 영적(靈的)인 영역까지 망라하는, 우주에서 가장 넓으면서 촘촘한 법망(法網)입니다. 증산을 신앙하려면, 보이는 이면의 것에 집중하여야 하며 근본을 파고 들어 깨치겠다는 구도의 기본을 망각해선 안됩니다. 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내 마음,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으나 엄연히 존재하는 나의 마음이요, 나의 신앙자세입니다. 내 신앙이 흔들리는 사람은 바로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하고 내 신앙의 출발점에서 내 신앙자세가 어떠했는지를 냉정하고 엄밀하게 성찰해야 합니다. 잘못되었었다고 판단이 서면 애체없이 내 신앙을 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검증의 대상은 어쩌면 나 자신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시작은 나로부터, 내 마음의 인식으로부터일 것이기 때문에. 내가 바르면 내 신앙도 바르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관건이고, 그 바탕은 생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어야 할 것입니다.

출처 : 태을도(太乙道) : 태을궁 용봉서신(太乙宮 龍鳳書信)
글쓴이 : 새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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