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을주와 태을도

[스크랩] 음력 4월 29일

태을세상 2015. 6. 16. 07:49

 

 상제님께서 어천 2년전 정미년(1907) "너에게 천지대업을 맡기리라."며 수부로 들여세우신 고수부님은 어천후 만 1년이 넘게 지난 경술년(1910) 9월에야 현몽으로 상제님이 돌아가셨음을 알게 됩니다.

 

 이듬해 신해년(1911) 4월 대원사에서 성령혼례식과 49일간 진법수행을 하시고 고부 와룡리 신경수의 집 윗방에서 100일 수행을 마친 직후 상제님 성탄치성 이틑날인 9 20일 혼절후 도통을 받으시고 신정을 행하시고, 24일에 약방의 약장과 궤를 인수해 대흥리로 옮기신후 29일에 교단창립을 선언 하십니다.

 

 교단창립 3년 무렵부터 차경석의 야심으로 법소이전을 고려하였으나 여러번 실패를 하시다가 7년째 되는 무오년(1918)에 조종골로 옮겨오십니다. 약장과 궤를 두고와 새로 약장을 짜시고 교단을 조용히 꾸려가시던 10년째 되는 무진년(1928) 정삼치성(13)에서 혼절하셔 깨어나신후 "상제님의 영정을 그리라" 하시어 3 26일에 봉안하게 됩니다(바로 전해인 정묘년 9월에 미륵전에서 상제님 성령이 떠나심을 선포하신 바 있습니다.) 그 해 5월에 7계잠을 공표하시고 간부조직을 변경하시고 9월에 보천교에 남겨두고 온 약장과 궤의 기운을 빼 쓰는 공사를 보시면서 본격적인 교단 일을 다시 도모를 하십니다. 마침 그 해 12월 동지에 이상호 이정립 형제가 용화동에서 동화교를 창립하고 이듬해 기사년(1929) 삼월에 대순전경을 편찬해 7월에 고수부님께 전해지게 되면서 조종골 교단과 동화교와 교류가 시작이 됩니다.

 

 2년여의 교류이후에인 신미년(1931) 동지에 조종골 교단과 동화교를 합친 통합교단을 조직하면서 고수부님께서 용화동으로 옮겨오십니다. 통합 이후 2년만인 계유년(1933) 동지치성 이후에 이성영에게 영정개사와 저술 도장건축등의 일을 당부하시고 영정을 잘 받들라 하신후 오성산 수양소로 이사를 하십니다. 이사하신지 약 한달만에 영정을 모셔오라 하시고 오성산으로 옮기시고 너희는 영정을 개사해 받들라 당부를 하십니다.

 

 오성산으로 이사하신지 2년만인 을해년(1935) 고수부님께서는 "잘꾸리고 있으라" 하시며 선화하십니다.

 

 고수부님께서 선화하시기 일년전인 갑술년(1934) 9 7일에 김경학 김영학이 고수부님을 찾아와 뵈며 수련중 상제님의 성령이 나타난 일을 아뢰며 수련법석을 주재해 주기를 청합니다.

 

 @ 갑술년(1934) 9월 초이렛날 친자 종도 김경학김영학이 와 뵈옵고 여쭈어 가로되 "저희들이 모악산 물왕암에서 수련을 행하던 중에 상제님의 성령이 나타나사 수십 년동안 천후님과 막혀 지낸 것을 꾸짖으시고 '이 길로 가서 너의 천후를 모셔다가 모든 지난 일을 타파하고 이전 정의를 다시 계속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으리라'고 정령히 계시하시므로, 저희 두 사람이 일동을 대표하여 왔아오니, 천후께서는 저희들의 이전 과실을 깊이 용서하시고 함께 가사 앞으로 사흘동안 수련법석을 주재하여 주시옵소서." 하며 추회의 눈물이 비오듯 하거늘, 천후 가라사대 "지난 일은 한갖 꿈과 같을 뿐이요 칠십노인이 멀리 와서 이렇듯 간곡히 말하니, 내가 비록 건강이 허락치 못할 지라도 멀리할 수 없노라." 하시고, 두 사람을 따라 물왕암에 가시니 곧 박공우의 주창에 따라서 김경학 김영학 이중성내외 이성영 김수응 등이 모여서 진법을 수련하는 법석이라. 천후 여러 사람들과 함께 사흘 동안을 머무르시다가 법석이 파함에 열하룻날 금산사를 들려서 용화동에 이르사 이틀 동안 머무르시며, 개사한 영정이 많이 틀렸음을 지적하사 다시 개사하라고 명하시고 용화동을 떠나 돌아가시니라. (천후신정기 p93)

 

 @ 갑술년(1934) 이중성이 광주 부호 현준오에게 1만원을 희사받아 대원사 물왕암에서 큰 치성을 올리고 9일간 진법주를 읽는 수련법석을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90이 넘는 대원사 주지 박금곡이 나와서, 이 좌석에 참석한 종도 김경학 김영학 등과 중도의 문인 이중성 이정립 윤순택 등의 얼굴을 차례로 살핀 후에 말하기를 "이 친필을 노장 백세 후에 전하지 못하면 유한이 아니겠는가." 하고 보발하고 있는 이중성에게 전하였다. 이 친필은 종이로 싸고 비단으로 싸서 보물처럼 보관된 것이었다. (범증산교사 p778)

 

 @ 증산상제님께서는 계묘년(1903) 4 11일 청련암에서 머무르실 때 해돋이에 '龍鳳(용봉)' 두 글자를 상하로 대응시켜 크게 쓰신 다음에 박금곡 주지에게 보관케 하셨습니다. (범증산교사 p776)

 

 @ 계묘년(1903) 사월에 증산상제님이 청련암에서 박금곡에게 써 주신 '龍鳳(용봉)'을 갑술년(1934) 구월에 이중성에게 전하여 지금까지 보전하여 왔음.(대순전경 속지)

 

 상제님의 성령이 인도를 하시어 고수부님이 주재하시고 상제님의 친자종도인 만국대장이자 의통대장이자 신대장인 박공우 성도가 주창하고 친자종도로 이부(인사권)에 임명된 김경학성도와 그외 여러 친자종도들이 참석하고 동화교 이정립등이 참석한 가운데 상제님이 무극대도를 받으신 대원사에서 진행된 진법수련법석에서 진법의 상징이자 천자의 상징인 상제님의 용봉친필이 대원사 박금곡주지를 통해서 이중성 선생에게 전해졌습니다.

 

 진법의 맥은 그렇게 공식적인 모습으로 삼부요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중성선생께 전해 졌으며 이중성선생은 그 뜻을 받아 일생을 수행에 정진하시며 후일에 정덕군자가 나와 이 책을 통해 진법을 펼쳐나갈 것을 예견하는 서문과 함께 상제님의 진법 정신을 천지개벽경이라는 책에 오롯이 담아 놓으시고 돌아가십니다.

 

 이중성 선생은 일본에서 유학하고 독립운동을 하던 중 보천교를 알게 되어 무진년(1928) 동지에 보천교에 입도해 상제님을 신앙하고 수행하며 자신이 신명계의 주벽이자 동방칠성인 이마두의 후신으로 이 세상에 왔음을 깨닫고 상제님 재세시에 초립동년의 나이로 친견하지 못하고 상제님 어천후에 상제님 신앙을 시작하고 상제님의 성령의 인도로 고수부님과 친자종도들의 참석하에 후천의 당요이신 상제님의 용봉친필을 전수받으며 후천의 순임금으로 임명을 받으신 것입니다.

 

 학암 이중성 선생님은 조직도 신도도 만들지 않으시고 상제님의 진법정신을 밝히는 책인 천지개벽경(대보경)만을 남기고 무술년(1958) 음력 4 29일 선화하셨습니다.

 

 오늘 음력 4 29일은 학암 이중성 선생님의 기일이자 무인년(1998) 학암선생의 유족 입회하에 태을도가 기두한지 만 17년째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출처 : 태을도(太乙道) : 태을궁 용봉서신(太乙宮 龍鳳書信)
글쓴이 : 충정(忠正)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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