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음력 4월 29일
상제님께서 어천 2년전 정미년(1907년)에 "너에게 천지대업을 맡기리라."며 수부로 들여세우신 고수부님은 어천후 만 1년이 넘게 지난 경술년(1910년) 9월에야 현몽으로 상제님이 돌아가셨음을 알게 됩니다.
이듬해 신해년(1911년) 4월 대원사에서 성령혼례식과 49일간 진법수행을 하시고 고부 와룡리 신경수의 집 윗방에서 100일 수행을 마친 직후 상제님 성탄치성 이틑날인 9월 20일 혼절후 도통을 받으시고 신정을 행하시고, 24일에 약방의 약장과 궤를 인수해 대흥리로 옮기신후 29일에 교단창립을 선언 하십니다.
교단창립 3년 무렵부터
2년여의
교류이후에인 신미년(1931년) 동지에 조종골 교단과 동화교를
합친 통합교단을 조직하면서 고수부님께서 용화동으로 옮겨오십니다. 통합 이후 2년만인 계유년(1933년) 동지치성
이후에
오성산으로 이사하신지 2년만인 을해년(1935년) 고수부님께서는 "잘꾸리고 있으라" 하시며 선화하십니다.
고수부님께서
선화하시기 일년전인 갑술년(1934년) 9월 7일에
@ 갑술년(1934) 9월 초이렛날 친자 종도
@ 갑술년(1934) 이중성이 광주 부호
@ 증산상제님께서는 계묘년(1903) 4월 11일 청련암에서 머무르실 때 해돋이에 '龍鳳(용봉)' 두 글자를 상하로 대응시켜 크게 쓰신 다음에 박금곡 주지에게 보관케 하셨습니다. (범증산교사 p776)
@ 계묘년(1903) 사월에 증산상제님이 청련암에서 박금곡에게 써 주신 '龍鳳(용봉)'을 갑술년(1934) 구월에 이중성에게 전하여 지금까지 보전하여 왔음.(대순전경 속지)
상제님의 성령이 인도를 하시어 고수부님이 주재하시고 상제님의 친자종도인 만국대장이자 의통대장이자 신대장인 박공우 성도가 주창하고 친자종도로 이부(인사권)에 임명된 김경학성도와 그외 여러 친자종도들이 참석하고 동화교 이정립등이 참석한 가운데 상제님이 무극대도를 받으신 대원사에서 진행된 진법수련법석에서 진법의 상징이자 천자의 상징인 상제님의 용봉친필이 대원사 박금곡주지를 통해서 이중성 선생에게 전해졌습니다.
진법의 맥은 그렇게 공식적인 모습으로 삼부요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중성선생께 전해 졌으며 이중성선생은 그 뜻을 받아 일생을 수행에 정진하시며 후일에 정덕군자가 나와 이 책을 통해 진법을 펼쳐나갈 것을 예견하는 서문과 함께 상제님의 진법 정신을 천지개벽경이라는 책에 오롯이 담아 놓으시고 돌아가십니다.
이중성 선생은 일본에서 유학하고 독립운동을 하던 중 보천교를 알게 되어 무진년(1928년) 동지에 보천교에 입도해 상제님을 신앙하고 수행하며 자신이 신명계의 주벽이자 동방칠성인 이마두의 후신으로 이 세상에 왔음을 깨닫고 상제님 재세시에 초립동년의 나이로 친견하지 못하고 상제님 어천후에 상제님 신앙을 시작하고 상제님의 성령의 인도로 고수부님과 친자종도들의 참석하에 후천의 당요이신 상제님의 용봉친필을 전수받으며 후천의 순임금으로 임명을 받으신 것입니다.
학암 이중성 선생님은 조직도 신도도 만들지 않으시고 상제님의 진법정신을 밝히는 책인 천지개벽경(대보경)만을 남기고 무술년(1958년) 음력 4월 29일 선화하셨습니다.
오늘 음력 4월 29일은 학암 이중성 선생님의 기일이자 무인년(1998년) 학암선생의 유족 입회하에 태을도가 기두한지 만 17년째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