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새 사람`으로 채워진 세상에만 `미래`가 있다
‘죄를 멀리한’ 순결한 마음과 ‘죄에서 돌아온’ 거듭난 영혼
(1) 정읍(井邑) 고부(古阜) 태생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 1871.9.19-1909.6.24*양력으로는 1871.11.1)은 자신이 득도했다는 소문을 듣고 가장 먼저 찾아온 전주 사람 태운장(太雲長) 김형렬(金亨烈: 1862-1932)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제 말세를 당하여 앞으로 무극대운(無極大運)이 열리나니 모든 일에 조심하여 남에게 척(隻)을 짓지(come to hate each other; have a grudge against somebody) 말고 죄를 멀리 하여 순결한 마음으로 천지공정(天地公庭)에 참여하라.”(대순전경 pp20-21)
이와 관련하여 증산은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한 적도 있습니다.
“남이 트집을 잡아 싸우려 할지라도 마음을 눅여서 지는 것이 상등사람이라 복이 되는 것이요, 분을 참지 못하여 어울려 싸우는 자는 하등사람이라 신명의 도움을 받지 못하나니 어찌 잘 되기를 바라리요.”(대순전경 pp347-348)
“다른 사람이 만일 나를 치면 그의 손을 만져 위로할지니라.”(대순전경 p327)
“크게 덕을 베풀고도 베풀었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오직 너를 잘 이겨내야만이 천하를 이기게 되느니라.”(정영규의 천지개벽경 p265)
증산은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의 대구 순교 이후 그의 신원(伸寃; 명예회복)을 바라며 운집하기 시작한 동학교도들의 폭력혁명 기운을 극구 반대 했습니다.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고부(古阜) 접주(接主) 전봉준(全琫準: 1854-1895.3)과 북도접주 손병희(孫秉熙: 1861-1922)가 연합하여 이십여 만 이상의 대군을 형성했지만 증산의 예언과 2대 교주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의 우려대로 연전연패(連戰連敗) 끝에 다들 타다 남은 재처럼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용봉서신>(龍鳳書信)을 지은 진산 이훈오는 증산의 훈계를 “(1) 순결한 마음 가짐 (2) 원수를 은인처럼 사랑하기 (3) 자기자신을 이겨내는 극기실천”으로 요약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경건과 사랑과 극기의 생활”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조심하라, 척짓지 말라, 죄짓지 말라, 순결하라”는 증산의 당부는 “이제 곧 말세가 닥칠 것이다, 온 우주가 바뀌는 후천개벽시기에 뽑힘을 받아 새로 열리는 후천 오만 년의 주역이 되려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다음 말로 연결되고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는 당시 유대인들의 지배계층이던 동료 ‘바리새파’ 사람들(Pharisees)의 눈을 피해 한밤중에 몰래 찾아온 니고데모(Nicodemus)라는 한 관리에게 말했습니다. 그 관리는 우선 속 마음부터 털어놓았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잘 압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당신이 행하는 여러 표적을 그 누구도 감히 하지 못할 것입니다.”(요한복음 3.1-2; “Rabbi, we know that You are a teacher come from God; for no one can do these signs that You do unless God is with him.”)
예수는 자신을 핍박하며 사사건건 흠집을 내려는 지배계층 바리새파에 속한 관리이면서도 한밤중에 찾아와 은밀히 제 속을 드러내는 그가 참으로 기특해 보였을 것입니다.
“진실로 내가 네게 말하지만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복음 3.3; “Most assuredly, I say to you, unless one is born again, he cannot see the kingdom of God.”)
당연히 그 관리는 반문했습니다.
“사람은 늙기 마련인데 어떻게 다시 태어납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요한복음 3.4; “How can a man be born when he is old? Can he enter a second time into his mother’s womb and be born?”)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고 한 말을 기이하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부니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지 않느냐?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다.”(요한복음 3.5-8)
그 관리는 너무도 신기한 내용이라 체면불구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러한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까?”(요한복음 3.9; “How can these things be?”)
이제는 예수 쪽에서 답답해 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대뜸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 위치에 있으면서 그래 이런 일도 알지 못하느냐?”(요한복음 3.10; “Are you the teacher of Israel, and do not know these things?”)
그러면서 뒤이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해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한복음 3.12; “If I have told you earthly things and you do not believe, how will you believe if I tell you heavenly things?”)
예수는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독생자”로 소개하며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독생자를 믿기만 하면 마지막 심판을 이기고 영생을 얻게 된다”(요한복음 3.15-18)고 한밤중에 은밀히 찾아온 그 관리에게 말했습니다. (John 3.15-16; “Whoever believes in Him should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ly begotten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ould not perish but have everlasting life.”)
“거듭나야 한다, 영적으로 거듭나야 한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로 세상에 온 것을 믿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며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멸망과 영생 중에서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고 어리둥절한 채 눈만 멀뚱거리고 있는 그 관리에게 되레 질문을 던졌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당시 지배계층에 속한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고 미워한 이유도 바로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했기 때문입니다. 신성모독(blasphemy)으로 결론짓고 그 증거수집과 증인 모으기에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러면서 “하늘에서 온 나만이 그 하늘나라와 하나님을 잘 알고 있으니 제발 내 말을 건성으로 듣지 말라”고 간곡히 호소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시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므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요한복음 4.23-24; “But the hour is coming, and now is, when the true worshipers will worship the Father in spirit and truth; for the Father is seeking such to worship Him. God is Spirit, and those who worship Him must worship in spirit and truth.”)
심지어는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다.”(요한복음 6.29; “This is the work of God, that you believe in Him whom He sent.”)라고 단언합니다.
(3) 언뜻 보아도 말의 ‘세기’(strength)부터가 다릅니다. 증산은 한국형 화두로 진리를 풀었고 예수는 작열하는 태양과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만큼이나 세찬 어조로 자신의 정체성(identity)과 사명을 강조했습니다. 증산은 우주질서의 재편과 세상의 급변을 예언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그 변화의 중심에 서 있는 우주의 재편자, 변화공정의 담당자임을 선포했습니다.
반면에 예수는 하늘나라와 세상을 잇는 ‘다리’내지 ‘사다리’가 바로 자신임을 설명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여 모든 것을 얻으려면 나를 보내신 이가 누구인가를 믿으라.’고 역설합니다. 죽음과 생명, 멸망과 승리, 순간과 영원을 대비하며 ‘쉽기 만한 이 길을 왜 그리 어렵게 보느냐?’고 반문합니다.
취지는 비슷하지만 논두렁 밭두렁 사이에서 묻어난 증산의 어조와 황량한 지형과 도도한 강물, 그리고 오아시스와 바다 같은 호수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땅에서 풍기는 예수의 어조는 왠지 사뭇 다르게만 다가옵니다.
증산은 한국인을 청중으로 놓고 말하고 있고 예수는 다민족 사회인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청중으로 놓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속속들이 달라지지 않으면 세상과 하늘의 그 어떤 변화와 조화 앞에서도 결코 승리자, 참여자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무섭게 경고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아주 비슷합니다.
증산은 밀려드는 외세의 파고를 알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새로운 가르침을 찾아 몰아치는 파도와 바람을 이겨내고 싶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가난과 질병과 무지가 뿔뿔이 흩어진 백성들을 더욱 더 고단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훤히 꿰뚫어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로마제국의 번쩍거리는 투구와 철컥거리는 칼집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온갖 모양의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로마사람들과의 거리를 좁혀 먹고 사는 사람들도 보고 그 거리를 좁히기 싫어 늘 딴전을 피우며 심통 사납게 구는 ‘삐딱한’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언제든지 죄인이 될 수 있고 언제든지 노예로 끌려갈 수 있는 그런 아슬아슬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저마다 살길을 찾기에 분주한 것을 보았습니다. 먹을 것이 모자라 싸우기보다 갈 길을 몰라 허둥대고 살길을 못 찾아 울고 있었습니다.
증산과 마찬가지로 예수도 가난과 질병과 외세의 간섭 때문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지배계층이 한없이 늘려놓은 규범과 관습의 사슬에 얽매여 신음하는 사람들이 걱정거리였습니다.
증산이나 예수나 ‘현재보다 미래를 앞세우고 육체보다 영혼을 더 높이며 세상보다 하늘을 더 강조한 점’만은 같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둘 다 ‘사람이 살아야 세상이다. 사람이 변화를 타고 넘어야 새 세상이 열린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강조하고 ‘사람됨됨이’를 높이 세운 것입니다. ‘땅에서 벌벌 기지만 말고 제발 끝없이 높기 만한 하늘을 바라보라!’고 애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증산은 ‘죄를 멀리하라’고 말합니다. 예수는 ‘죄에서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증산은 죄와의 ‘거리’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이미 누구나 다 죄인이지만 그 죄에서 돌아서서 새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증산은 마음가짐과 생활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육체와 영혼을 태초의 상태로 되돌아가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흙으로 빚어 만든 육체와 그 흙덩어리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었던 그 천지창조의 마지막 단계를 상기하고 있는 겁니다. 흙으로 만든 ‘신의 형상’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고 있는 그 엄숙하고 거룩한 ‘신의 작업장’을 떠올리고 있었던 겁니다.
“내 말을 알아듣고 잘 따라와야만 비로소 생명을 지닌 사람이다. 내가 누군가를 아는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다. 어째서 한줌거리 땅에 매여 쩔쩔매느냐? 어째서 이렇게 간곡히 말해도 믿지를 못하느냐? 죽으려고 환장을 하지 않았다면 왜 그리 답답하게 구느냐? 하늘의 비밀을 이렇게 쉽게 풀어서 네 귓구멍에 밀어 넣어주고 네 이마에 철썩 붙여주는데도 왜 그리 믿지를 못하느냐?” 이것이 바로 두 초월자의 핵심적인 메시지입니다.
‘이리저리 쏠리지 말고 핵심을 제대로 알아 단단히 매달려 있으라.’고 하는데도 좀처럼 그 핵심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몇 십 년 날숨 들숨에 매달려 헉헉거리고 허우적거리는 것이 바로 우리의 참 모습인데도 육체의 희로애락에 붙들려 헤어날 겨를이 없습니다.
시간차이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몇 년, 몇 십 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초월자들은 수백, 수천 년을 단숨에 건너뛰어 몇 만 년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목숨이 지닌 기한밖에 모릅니다. 초월자들은 사람의 가느다란 숨소리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부스러기 시간, 가루로 흩날리는 그 조각 시간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우주의 계절과 시간을 그려놓고 우리에게 주목하라고 말합니다.
‘영혼’이 있어 사람이고 ‘영혼에 대한 관심’이 있어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이 있어 사람이고 ‘마음을 깨끗하게 간직하려는 고민’이 있어 사람입니다. ‘정신’이 있어 사람이고 ‘정신을 정신답게 지켜내려 육체의 길을 늘 경계’하기에 비로소 사람입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있고 ‘죽음을 준비하려는 노력’이 있는 탓에 사람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죽은 다음에 올 색다른 차원의 세상’을 늘 궁금해 하는 탓에 사람입니다.
증산과 예수는 ‘영혼에 대한 생각’이 특별하고 ‘죽음’에 대한 각오가 색달라야 희망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증산과 예수는 ‘영혼에 대한 생각’과 ‘죽음에 대한 각오’를 알면 그가 새 사람인지 헌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증산은 ‘상등사람’을 새 사람으로 보았고 예수는 ‘거듭난 사람’을 새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증산은 ‘죄 지으며 사는 사람’을 ‘더러운 마음’을 지닌 ‘하등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는 ‘사람의 영이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떠나면’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영’을 비우고 ‘거룩한 하나님의 영’으로 채워야만 희망이 있다고 했습니다.
‘상등사람’으로 채워진 세상,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난 새 사람’으로 채워진 세상이 바로 ‘생명이 발붙이고 살만한 진짜 세상, 참다운 우주’라고 단언합니다. 한민족의 희망은 남한 사람, 북한 사람에 있지 않습니다. 한민족의 희망은 경상도니 전라도니 충청도니 하는 그 지방별 청군백군 나누기에 있지 않습니다. ‘상등사람’과 ‘거듭난 사람’으로 가득 채워져야 비로소 희망이 있습니다.
논두렁 밭두렁을 거닐 때는 한번쯤 증산을 생각합시다. 물소리, 바람소리 더 가깝게 들릴 때는 예수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다시 한번 떠올립시다. 한민족을 향한 메시지 속에 한민족을 위한 메시아의 음성이 곁들여 있습니다. 일단 귓구멍부터 열어놓고 뚫어놓아야 속 눈이 떠지고 속 마음이 열려 제 울고 있는 영혼을 새삼스레 반갑게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