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증산의 제자교육

[스크랩] 태을도 2014년 3월 도무치성 도훈: “진리의 힘, 사랑과 용서의 힘”

태을세상 2014. 4. 1. 10:41

태을도 2014년 3월 도무치성 도훈: “진리의 힘, 사랑과 용서의 힘”

양력 2014.3.29 (음력 2014.2.29)

 

   2014년도 3월이 어느새 끝나가고, 지난 겨울이 그렇게 춥더니 어느새 초여름 날씨가 되어갑니다. 시간은 참 빨리 가는 것 같습니다. 옛날 어르신 말씀이 ‘시간이라는 것은 화살같이 빨리 가니, 시간 낭비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하라.’고 하신 말씀이 빈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오늘은 ‘진리의 힘이 무엇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살아가는데 기본적으로 말(언,言)을 하고 살아갑니다. 가만히 사람들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말하는 것이 참 다양한데, 그것들을 크게 대별해 보면 어떤 분은 가능한 한 긍정적인 말을 많이 하는 반면, 어떤 분은 매사에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환경의 탓일 수도 있고 본인의 신념의 탓일 수도 있는데, 하여튼 그 말버릇은 하루아침에 바뀌어지는 것 같지 않습니다. 어떤 것에 대해 토론하더라도 꼭 부정적인 것을 지적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어떤 분은 긍정적인 것을 지적하고, 또 어떤 분은 장점을 지적하는가 하면 또 어떤 분은 단점을 지적하고, 그리고 자기에게 조금 서운케 한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을 포용하고 감싸안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사람의 단점을 들어가며 서운한 쪽으로 이야기를 푸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만히 들어보면, 사람들의 이야기하는 경향이라던가 이야기하는 흐름 속에서, 그 사람의 감정이 묻어나고 그 사람의 성향이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상제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가르침은, 상극의 세상을 마감하고 상생의 세상을 열어가는데 있어, 상생의 세상을 열어 갈 수 있는 말과 글과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상제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해서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과연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오늘 읽은 강증산과 태을도 259쪽의 글을 보면, 상제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언습(言習)을 삼가라. 시속(時俗)에 먹고 살려고 좋은 반찬에 잘 먹고 나서는 문득 배불러 죽겠다고 말하며, 일하여 잘살려고 땀 흘리며 일한 뒤에는 문득 힘들어 죽겠다고 말하니, 이 때는 말대로 되는 때라. 병이 돌 때에 어찌 죽기를 면하리오.”(대순전경 pp.134~135)

 

   이것이 대체적인 일반 사람들의 언습(言習)이라는 것입니다. ‘배불러 죽겠다’ ‘힘들어 죽겠다’ ‘좋아 죽겠다’, 그러니까 뒤에 ‘죽겠다’라는 말이 붙어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하냐 하면 선천은 독기와 살기가 지배하는 상극지리(相克之理)의 그런 시대였기 때문에 자기자신도 모르게 말에 상극지리의 습관이 배인 것입니다. 그러니 걸핏하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가리지 않고 ‘죽겠다’는 말을 갖다붙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상제님께서 “이 때는 말대로 되는 때라. 병이 돌 때에 어찌 죽기를 면하리오.”하신 것입니다. ‘힘들어 죽겠다.’ ‘좋아 죽겠다.’ ‘기뻐 죽겠다.’ 뒤에다가 꼭 ‘죽겠다’는 말을 하니 그렇게 말대로 된다고 상제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상생세상을 이루어가는 상제님 제자들의 언행은 죽겠다는 말을 빼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독기와 살기를 빼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상제님께서 아무리 그렇게 말버릇을 고쳐라 글버릇을 고쳐라 해도, 상제님 제자들이 하루아침에 고쳐지진 않지요.

 

   김형렬 성도가 지인지감(知人知鑑)이 있어,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이 너무나 탁월해서 사람을 정확히 알아보니까, 사람을 밑으로 내려다 보게 되어 교만심과 거만심이 발동해서 독기와 살기를 품는 말을 해서 타협도 못하고 하니, 상제님께서 ‘악장제거무비초(惡將除去無非草) 호취간래총시화(好取看來總是花) - 풀이라고 보면 풀 아닌 게 없고, 꽃이라고 보면 꽃 아닌 게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진리의 생활을 하는 사람은 진리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진리의 힘이 길러집니다. 진리의 언어는 무엇이냐? 결국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말이라는 것입니다. 긍정하고 포용하는 마음이 담긴 말이라는 것입니다. 상생이라는 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글버릇을 고치고 말버릇을 고치고 행실을 고쳐야지 상생인간이 되고, 또 상생인간이 그런 말과 글을 통해서 진리를 펼쳐나간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사랑과 진리를 전하는가? 말과 글과 행실로 모범을 보여 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제님의 가르침을 받아가지고 진리의 생활을 한다는 사람이, 자기를 조금 욕했다고 해서 ‘가서 손 좀 보라’고 한다든지 ‘가서 테러하라’고 한다든지, 자기 의견하고 조금 안 맞는 그런 진리해석을 했다 혹은 상제님 말씀을 나하고 다르게 생각했다고 해서 아주 육두문자로 폭언을 퍼붓는다든지 하는 사람들은, 진리의 길을 가는 기본이 안 되어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진리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사랑과 용서의 힘이 길러져서, 자기 스스로 자기마음을 통제해서 그 말과 글이 순하게 나옵니다. 상제님이 말씀하시기를 차경석 성도에게 “너는 양반의 기습을 빼버려라. 양반의 기습을 빼버리지 않으면 망하는 기운이 따르게 된다.” 그리고 “대인의 공부를 닦는 자는 항상 온화하고 공근한 기운을 길러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항상 따뜻하고 부드러운 기운을 길러야 된다는 것입니다.

 

   차갑고 냉냉하고 쌀쌀하게 되면, 그것은 진리의 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리의 힘은 결국 사랑과 용서의 힘입니다. 사랑과 용서의 힘을 길러야지 진리의 힘이 나옵니다. 진리의 힘은 사랑과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상제님 말씀에 “너희들은 진리로써 결실하고 유화(柔和)로써 해원하라.” 결실을 뭘로 하는가? 진리로써 하는데 진리의 속성이 뭐냐 하면 유화한 것 - 부드럽고 화합된 것입니다. 상제님께서 해원하러 오셨잖아요? 강압으로써 해원하는 것이 아니고, 부드러움으로써 화합함으로써 해원해야 상생세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상제님께서 이런 처세글도 읽어 주셨습니다.

 

“처세유위귀(處世柔爲貴) 강강시화기(剛强是禍基) 발언상욕눌(發言常欲訥) 임사당여치(臨事當如痴) 급지상사완(急地常思緩) 안시불망위(安時不亡危) 일생종차계(一生從此計) 진개호남아(眞個好男兒) - 처신은 항상 부드럽고 신중하게 하라. 강하고 강한 것이 화의 근본이라, 말을 할 때는 어리석은 듯이 하고, 일에 당해서는 조금 모자란 듯이 행동하고, 위급할 때에는 평안함을 생각하고, 평안할 때에는 위급함을 생각하라. 일생동안 이렇게 생활하면 그야말로 호남아라 하리라.” (대순전경 p.121)

 

   강하고 강한 것은 상극의 척과 살(煞)을 초래하기 쉬우니까, 부드러워지라는 것입니다. 사람도 나이가 들어서 저 세상으로 갈 때가 되면 강직해집니다. 몸이 뻣뻣해지지요. 나무도 봄철에 새 잎이 나오는데 얼마나 보드랍고 부드럽습니까? 진리의 힘은 보드랍고 부드러운 것입니다. 강하고 투쟁적인 기운으로 진리의 힘을 길러가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고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진리의 힘을 길러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의 언어이고 진리의 힘입니다. 어떤 사람이 진리의 길을 제대로 걸어가고 있는지, 진리의 힘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지, 그것을 보려면 사랑과 용서의 언어를 많이 사용하는가? 부드럽고 화합하는 언어를 많이 사용하는가? 그것을 보면 된다는 겁니다.

 

   달라이 라마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내는 사랑을 잉태하는 것이라.” 인내를 통해서 사랑을 잉태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면 ‘내가 사랑이 부족해서 하늘에서 사랑하는 힘을 길러 주려고 나의 인내심을 테스트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달라이 라마는 그렇게 교육을 한답니다. ‘자비는 인내 속에서 길러진다.’고요. 상제님도 제자들에게 상생의 힘, 진리의 힘, 사랑과 용서의 힘을 길러 주려고 부단히 애를 쓰셨습니다.

 

   한 번은 상제님께서 글을 많이 써서 두루마리(卷軸)를 만들어 제자들에게 주면서 “방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이 두루마리를 불 사르라.”고 하셨습니다. 거기에 있었던 김형렬, 김갑칠, 김경학, 김윤근, 신원일 이런 성도들이 그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하면, “이 두루마리가 다 탈 때까지 나오지 마라. 일을 하는 사람은 화지진(火地晉)도 하느니라.” 이렇게 신신당부를 한 후에 문을 잠그고 두루마리를 태우니까 매케한 연기가 얼마나 심하게 났겠어요? 그래서 참다 참다 결국 더 이상 못참고 김윤근, 신원일이 뛰쳐나왔습니다. 후에 상제님이 돌아가시자 신원일이란 사람은 엉뚱한 선생을 찾아서 중국을 가다가 객사를 당합니다. 땅위에 불이 이글이글 끓는 곳을 뚫고 지나가는 게 ‘화지진’인데, 화지진을 하려면 참아야 할 것 아닙니까? 상극에서 상생으로 넘어가려면 참고 또 참아야 합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에게 쌍소리가 나오고 격한 감정이 나올 때면 참아야 합니다. 세 번 참으면 살인도 면한다고 하잖아요? 상극에서 상생으로 넘어가려면 첫째도 참아야 하고 둘째도 참아야 합니다. 상제님의 가르침을 가지고 세상사람들 독기와 살기를 빼서 상생사람 만들려면 못 볼 것도 보고, 여러 가지 경우를 다 접할 것 아닙니까? 그럴 때 상제님은 참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참는 속에서 사랑과 용서의 힘을 길러라. 그것이 진리의 힘이다.” 상제님께서 그런 교육을 여러 모로 가르치십니다.

 

   장흥해의 유아가 병이 들어서 죽으려고 해서, 상제님에게 살려달라고 왔어요. 상제님께서 찬물을 먹이라 했는데, 결국 장흥해의 유아가 죽었어요. 결국은 죽을 운수니까 상제님께서 다른 처방을 안했겠지요. 그런데 장흥해의 아버지인 장효순은 천동소리를 듣는 사람이라, 상제님에게 억한 마음을 가지고 찾아와서 행패를 부립니다. 상제님의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상제님까지도 큰 화를 당했는데, 나중에 장효순이란 사람이 죽었어요. 장효순이 죽으니까 제자들이 무슨 말을 했는가 하면, “우리를 그렇게 괴롭히고 선생님을 괴롭혔던 장효순이 죽었는데, 우리가 그놈을 죽였어야 했는데 참 한스럽습니다.”고 하니, 상제님께서 뭐라 말씀하셨는가 하면 “사람의 죽음이란 것은 참 불쌍한 것이다.” 그렇게 못된 짓을 하다가 죽었는데, 일반적인 사람들 같으면 ‘잘 죽었다’고 하고 한바탕 욕을 할 판인데, 상제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그 사람이 진리를 제대로 모르고 자기의 진면목을 찾지 못하고 죽었으니 얼마나 불쌍한 사람이냐?”하고 말씀하셨어요. 인간이 인간다움을 찾아서 인간으로서 결실을 맺어야 되는데, 결실을 맺지 못하고 상극지리를 벗어나지 못해서 죽어가는 인생들이 상제님 입장에서는 얼마나 불쌍하겠어요. 그러니까 상제님께서 진멸지경에 박도한 천하창생들을 생각할 때에, “전 인류가 진멸지경에 이르렀는데 아무리 하여도 전부 다 건져 살리기는 어려우니 어찌 원통하지 아니하리오.”하시면서,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해 흐느껴 우셨던 거지요.

 

   사람이라는 것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신령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에,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절대 사람이 안 바뀝니다. 체질이 안 바뀌고 말투가 안 바뀌고 글이 안 바뀝니다. 상제님 말씀처럼 말에 습관이 배여서 ‘힘들어 죽겠다.’ ‘배불러 죽겠다.’ ‘좋아 죽겠다.’ 꼭 끝에 ‘죽겠다’는 말이 붙어 다닙니다. 그러니 얼마나 상극지리에 오염되어있는 거예요? 윤회환생을 하면서 오염된 그런 우리들을 상생으로 바꿔나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인내하고 참고, 사랑과 용서하는 힘을 길러내야 합니다. 그런 힘이 길러지지 않으면 결코 급살병(急煞病)에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급살병에서 살아남는 것은, 누가 나를 살려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내 말버릇을 고치고 내 글버릇을 고치고 내 행실을 고쳐서 척과 살을 풀어내야 내가 살아나는 것이지, 내가 내 마음을 안 바꾸는데 누가 나를 살려준다고 내가 살려날 수가 없어요. 내가 언습을 안 바꾸고 내가 글을 안 바꾸고 내가 행실을 안 바꾸는데, 어떻게 내가 상생세상의 주역이 되는 상생인간이 될 수 있겠어요?

 

   진리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상제님 말씀을 많이 언급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진리의 인간이냐? 그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상제님 글을 많이 외우고 많이 언급하는 사람이 잘못하면 위선자가 될 수 있고, 잘못하면 진리의 사기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진리의 인간인지 상생의 인간인지 그것을 보려면, 그 사람에게 사랑과 용서의 힘이 얼마만큼 있는가? 그 사람이 그런 언어를 얼마만큼 구사할 수 있는가? 그것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言)하는 것을 각자 모아서 분류해 보면, 사랑과 용서의 감정을 실어서 이야기하는 것이 많은 사람도 있겠고, 상대적으로 적은 사람도 있는 등 여러 가지 부류가 있을 것 아니겠어요?

 

   상제님께서 “너희들의 말이 천지에 퍼져서 천지에 열매처럼 달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되면 다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망언을 하지 말고 상극을 짓지 말라.” “너를 이겨야만이 천하를 이긴다.” 망언을 하려는 유혹, 상극을 지으려는 유혹, 그런 것을 자신이 잘 이겨야지 천하를 이긴다는 것입니다. 태을도인이라는 것은 사랑과 용서를 정말로 실천하는 사람이 태을도인이지,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은 말로만 태을도인이지 태을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리의 길을 간다는 것은 거듭 이야기하지만 사랑과 용서라는 것이고 인내라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과 용서를 해야지만 나도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사랑과 용서 속에서 옵니다. 사랑과 용서를 해야지 마음의 평안을 얻습니다.

 

   역대 유불선 서도의 성인들이 하나같이 이야기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미워하고 복수하라고 이야기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투쟁하고 증오하라고도 안 했습니다. 전부 ‘용서해라’ ‘원수도 사랑해라’ ‘참고 인내하라’ ‘진정한 행복은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이다’ ‘세계 평화는 사랑과 용서 속에서 이루어진다’ 공통적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사랑과 용서 속에서 천지 부모님을 닮은 성품이 길러지고 본래 생명의 근원자리인 태을이 밝혀진다는 것입니다. 연습은 대가를 만든다고 했듯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니지만, 부단히 자기 스스로를 점검하고 반성하고 그런 속에서 하나하나 조금씩 바꿔가면 어느 순간에 괄목상대하게 내 스스로가 바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제님께서 1901년부터 1909년까지 천지공사를 하시고, 고수부님이 1911년 증산종단을 결성해서 태을도를 선포해서 이제 100년 정도 흘렀는데,정말로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는 그런 태을도인들에 의해서 상제님 신앙인들을 올바른 길로 안내하고 상제님 고수부님의 뜻을 밝히며 나아가야, 세상 사람들이 “아, 강증산이란 분은 제자들이 저렇게 훌륭하니 옥황상제로 우리가 모셔도 되겠구나!”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 제자들이 잘못하면 상제님도 욕을 얻어먹습니다. 우리 태을도인들이 정말로 말과 글과 행실의 독기를 빼서 상생으로 바꾸는데 열심히 노력하는, 그런 연습을 많이 하도록 합시다.

출처 : 태을도(太乙道) : 태을궁 용봉서신(太乙宮 龍鳳書信)
글쓴이 : 충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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